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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un 12. 2018

가정 폭력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정의 문제는 대문이 닫히는 순간, 누구도 개입할 수 없게 된다 

제목: 아직 끝나지 않았다(Jusqu'a La Garde, Custody, 2017 作)

감독: 자비에 르그당

출연: 레아 두르케(미리암 役), 드니 메노셰(앙투안 役), 토마 지오리아(줄리앙 役), 마틸드 오느뵈(조세핀 役)

#1시간 33분 #가정 #폭력 #트라우마 #거짓말 #아이 #공포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영화의 원제는 양육권을 의미하는 Custody. 제목을 반영하듯 영화는 미리암의 양육원을 두고 앙투안(母)과 줄리앙(父)이 판사 앞에서 다투는 씬에서 시작된다. 앙투안은 줄리앙의 협박과 폭력을 근거로 접근 금지를 요청하고, 줄리앙은 앙투안의 주장이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불법적인 방법으로 미리암과 자신의 부자관계를 가로막고 있다고 항변한다. 전사(前史) 없이 제공되는 이 갈등 속에서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판사는 앙투안이 미리암의 양육권을 갖되 미리암이 2주에 한 번씩 주말을 줄리앙과 보내게 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럼에도 관객은 판결의 정당성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본질적으로 양육권에 대한 진실공방의 과정을 다룬 영화일까. 그렇지 않다. 자비에 르그당 감독은 영화를 통해 가정 폭력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에둘러서 간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가정 폭력이 한 사람의 일생을 얼마나 망가뜨리게 되는지 지체 없이 보여준다.


앙투안과 줄리앙의 논쟁처럼 가정 폭력에 대한 진실은 당사자밖에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앙투안과 줄리앙. 두 사람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미리암이 판결에 따라 처음으로 줄리앙의 집을 가는 날, 명백하게 드러난다. 줄리앙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미리암을 반강제적으로 차에 태우고, 미리암이 하는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으면 미리암을 다그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미리암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분노와 두려움이 미리암의 앳된 얼굴로부터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미리암의 표정만이 아니다.

 미리암은 자신과 앙투안에 대해 캐묻는 줄리앙에게 거짓말을 한다. 줄리앙으로부터 가정을 지키기 위한 미리암의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이의 거짓말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미리암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줄리앙 앞에서 그럼에도 거짓말을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미리암의 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 줄리앙이 누나 조세핀의 생일 파티에서는 아이들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으로 놀고 있는 모습은 이전의 씬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가정 폭력이 한 아이의 삶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보여준다.


줄리앙에 의한 트라우마가 미리암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줄리앙은 자신이 저지른 모든 과오들이 가족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앙투안과 미리암은 사랑이 아닌 공포를 느낀다. 결국, 줄리앙은 미리암을 다그쳐 앙투안이 사는 곳을 찾아내고 불쑥 들어가 가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자신은 변했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줄리앙은 앙투안을 안지만 미리암과 줄리앙에게는 이 모든 것이 폭력이다. 명백한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접근하는 줄리앙 앞에 가족은 무력하다.

 자비에 르그당 감독은 이와 같은 연출을 통해 관객들에게 법의 테두리 안에 있을지라도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영화의 주제의식을 극대화시키고자 자비에 르그당 감독은 후반부에 폭풍전야처럼 앙투안과 미리암이 평온하게 집에서 지내는 모습을 미동도 없이 오랫동안 담아낸 뒤, 줄리앙이 다시 찾아와 모자의 평화를 침범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연출해낸다. 사냥꾼처럼 앙투안과 미리암을 쫓는 줄리앙과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들 가족의 위계질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리암과 마찬가지로 앙투안 역시 매순간 공포를 경험한다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함으로써 줄리앙이 체포되고 영화는 끝을 맺지만 영화의 제목처럼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의미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미리암과 앙투안이 직면한 가정 폭력의 공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죄질의 무게로 봤을 때, 줄리앙은 징역을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줄리앙이 출소를 하면 미리암과 앙투안은 또다시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영화 속에서 공권력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습을 해줄 수 있을 뿐,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는 못한다. 한편으로는 사건 자체는 종결됐으나 미리암과 앙투안 모두 줄리앙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게 남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폭력의 연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리암을 데리고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간 줄리앙은 식사 중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에 식탁을 뒤엎고 말다툼을 벌인다. 그런 줄리앙에게 아버지는 "이 집에서는 내가 왕이야"라며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줄리앙이 어렸을 적, 미리암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폭력은 상처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물림 된다. 미리암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영화의 오프닝처럼.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미리암과 앙투안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가정의 문제가 아무리 법의 테두리에서 논의되고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집의 대문이 닫히는 순간, 제삼자의 개입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가정 내 여성 혐오의 재생산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핵심은 현실 속 많은 사람들이 닫힌 대문 내부에서 미리암과 앙투안처럼 상시적인 폭력에 노출돼있다는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무겁게 내려앉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한 가지 생각이 유독 머리에 맴돌았다. 판사가 미리암의 입장에서 조금 더 진중하게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었다. (영화 속에서) 공권력이 보장하는 객관성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일하게 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피해자가 부담해야 하는 피해의 정도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늑대와 양을 아무런 제약 없이 한 울타리 안에 풀어주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 될 수 없다. 그건 양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영화는 관객들에게 진정한 공권력이 역할이 무엇인지 반문하게 한다. 아울러 기계적 중립 뒤에 숨은 형식적인 절차가 아닌,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을 가해자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 마련의 필요성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만든다.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처럼 가정과 사회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깊어진다.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욱 직면하고 바라봐야만 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에.


 자비에 르그당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끝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캐치할 수 없지만 가정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섬세한 연출과 서사 구조는 자비에 르그당 감독의 의사를 무리없이 뒷받침한다. 따라서, 작품성이 보장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는 평을 내리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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