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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un 07. 2020

언덕 위의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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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역에서 한참을 걷다 샛길로 빠지면 이내 경사가 심한 언덕을 마주한다. 오르는 길엔 숨이 턱까지 차고 내려오는 길엔 자칫 고꾸라질 것만 같은 그런 경사. 중고 냉장고를 배달하던 아저씨가 그 언덕 중간에서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정해진 배달비에 만 원을 더 얹어주겠노라 약속했고, 냉장고는 무사히 우리의 새 보금자리에 안착했다.


사회생활 3년 차. 월급이 20만 원 오르는 사이 보증금은 2,000만 원이나 올랐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감행했지만 우리의 예산에 맞는 곳은 흔치 않았다. 그 와중에 발견한 언덕 위의 빌라는 그야말로 꿈의 장소였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비교적 깔끔한 상태였고, 직사각형으로 넓게 뻗은 원룸에는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 가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25만 원. 그래, 이 정도라면 가파른 언덕쯤은 문제도 아니지.


- 그 구두 사길 잘했다. 너랑 딱 어울려.


희재 언니가 이런저런 옷들을 꺼내 나에게 입혀보았다. 미간에 잡힌 주름과 오므려진 입술은 그녀가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말해준다. 새 신발과 꼭 맞는 스타일을 찾을 때까지 그녀는 패션쇼를 한 판 벌일 것이다. 희재 언니라면 방송작가보다 패션 스타일리스트가 더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 오케이, 내일 출근할 땐 이렇게 입는 걸로 하자.


그녀는 신줏단지 모시듯 출근복을 고이 접어 한 편에 놓았다. 내일 희재 언니의 원피스는 내가 입고, 내 가방은 희재 언니가 멜 예정이다. 작은 키에 마른 체형, 건조한 피부까지. 공통점이 많은 우리는 원룸뿐 아니라 옷, 신발, 가방, 화장품까지 모든 것을 공유했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적금 붓듯 쇼핑에 투자하고 옷장과 신발장이 채워지는 행복으로 살았다. 쇼핑백을 들고 집에 오는 길만큼은 가파른 언덕도 힘들지 않았다. 행복의 값어치가 겨우 2만 원, 3만 원이라니. 이 정도면 괜찮은 투자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 니들은 쇼핑이 그렇게 중요해? 이 물질적인 것들.


옆에서 치킨을 먹던 강 언니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녀는 편집실에서 밤을 새운 다음 날이면 우리 집에 들러 잠을 자곤 했는데, 그런 날 저녁은 영락없이 치킨을 먹었다. 나는 다큐를 쓰려다 본인의 인생이 다큐가 되었다는 강 언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프라이드치킨과 콜라가 담긴 봉지를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을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봉지에 담긴 행복의 값어치가 1만 원 남짓이었으니, 희재 언니와 나는 사치를 벌이는 물질적인 것들임이 분명했다.


- 응. 쇼핑이 중요해. 넌 물질적인 것들 싫어하니까 콜라는커녕 공기도 마시지 마.


희재 언니는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물고는 티브이 채널을 돌렸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인트로 뮤직이 흘렀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케리 브래드쇼'가 등장했다. 그녀는 뉴욕이라는 화려한 동네에 사는 유명 칼럼니스트였다. 희재 언니는 매회 등장하는 케리의 세련된 스타일에 감탄했고 마놀로 구두로 꽉 찬 신발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 뉴욕 진짜 가보고 싶다......

- 난 마놀로 구두 따위 필요 없으니까 큰 신발장 사서 꽉 채워봤음 좋겠다.

- 저렇게 높은 원고료를 받는 작가가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 너는 물질적인 거 싫어하는 애가 높은 원고료는 왜 따져?

- 꿈이라도 좀 꿔보자. 내가 회당 천만 원 받는 작가라고 상상이라도 해보자고.


티브이를 보며 티격태격하는 동안 언덕 위의 빌라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짧은 드라마가 끝나고 긴 밤이 이어질 때 우리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 언니, 내가 회당 천만 원 받는 작가 되면 마놀로 구두 열 켤레 사줄게.

- 그럼 나는 너 가방 열 개 사줄게.

- 나는 평생 치킨 쏜다.  


그날 밤 우리는 모두 '케리 브래드쇼'가 되는 꿈을 꾸었다. 우리에게 서울은 뉴욕만큼 화려했고 3만 원짜리 구두는 마놀로만큼 예뻤다. 어디 그뿐인가. 대흥동 언덕 위의 빌라는 케리의 뉴욕 아파트와 견주어 부족함이 없을 만큼 아늑했다.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케리는 마놀로 구두를 신고 언덕을 오르내리지 않았다는 사실......


늦잠 끝에 서두른 출근길. 나는 희재 언니의 겨자색 원피스에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언덕을 내려갔다. 길이 들지 않은 구두에 쓸린 발뒤꿈치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언덕을 내려갈 때까지만 참자.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가속이 붙어 종종거리는 모양새가 되더니 끝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어엇!


철퍼덕. 제일 먼저 새 구두가 날아갔고 다음으로 이마가 콘크리트 바닥을 찧었다. 누가 볼세라 벌떡 일어나는 순간, 피로 붉게 물든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투둑, 투둑. 굵은 핏방울이 이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겁이 난 와중에도 뒷굽이 떨어진 채 나뒹구는 새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와락 눈물이 났다.


- 언니이......


아침에 집에서 헤어진 희재 언니를 세 시간 만에 병원 응급실에서 다시 만났다. 깨어진 이마를 촘촘히 꿰매고 난 뒤였다. 언니는 피로 얼룩진 원피스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언니가 좋아하는 옷인데...... 피가 떨어져서......

- 누가 지금 옷 버렸다고 뭐라 한대?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어? 괜찮아? 어지럽진 않고?


응. 괜찮아, 하면서 나는 다시 와락 눈물을 쏟았다. 미세 혈관에서 나온 피인지라 상처는 깊지 않다고 했고, 운 좋게도 성형외과 담당 의사가 예쁘게 꿰매 주어 흉터도 크지 않을 것이라 했다. 희재 언니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는 내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 구두가 망가졌다며. 전철역 상가에서 급하게 샀어. 집까지 맨발로 갈 순 없잖아.


쇼핑백 안에는 반짝이는 리본이 달린 샌들 한 짝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패션 센스를 발휘할 새도 없이 아무거나 빨리 주세요, 하고 서둘러 구입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샌들을 꺼내 신고는 언니와 함께 응급실을 나왔다. 희재 언니가 한 발짝 앞서 가며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집에 가서 불고기 해줄게. 너 피 많이 흘려서 고기 좀 먹어야겠다, 하는 언니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애꿎게 내려 본 나의 발 끝에선 햇빛을 받은 리본이 반짝이고 있었다. 3만 원짜리 새 구두보다 예쁘고, 마놀로 구두보다 값진 샌들을 내가 신고 있었다.


2005년 여름.

이마에 초승달 같은 흔적을 새긴 날.

언젠간 희재 언니에게 마놀로 구두를 사주겠노라고 다짐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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