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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May 31. 2020

합정동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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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마포구, 영등포구, 구로구, 구, 구, 구...... 서울이 큰 줄은 알았지만 구가 스무 개도 넘는다는 건 방을 구하며 처음 알았다. 오빠의 신혼집에 얹혀살던 희재 언니나 1.5평짜리 고시원 생활을 하던 윤 언니라고 나와 다를 것도 없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3만 원. 오랫동안 발품을 팔은 끝에 우리는 합정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 둥지를 틀었다.


- 가장님 출근하신다.


희재 언니가 나갈 채비를 마치면 우리도 주섬주섬 눈곱을 떼었다. SBS 출입증을 지닌 희재 언니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방송아카데미 동기들 중 제일 먼저 막내작가가 된 그녀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연예인들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래서 희재 언니의 월급은 120만 원. 뉴스 속보나 스포츠 중계로 방송이 죽을 때마다 30만 원씩 감봉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집에선 제일 높은 수입이었다. 가장님의 출근길. 그녀는 꽃처럼 아름다울 뿐 아니라 뒤통수에서도 빛이 났다.


- 우리도 서둘러야 해. 이러다 늦겠다.


윤 언니는 나를 재촉하며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도 외출복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백수인 우리에게도 월요일은 꽤나 바쁜 하루다. 값이 저렴한 조조 영화를 시작으로,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알바 거리도 수소문해야 한다. 건너 건너 인맥으로 얻게 된 퀴즈 프로그램의 전화 상담 알바만으론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 말이다.


- 영화 끝나면 잠깐 아웃렛 구경도 하고 오자. 면접 볼 때 입을 만한 옷이 있을까?


우리는 아무 진전 없는 취업 걱정을 하며 집을 나섰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옷이 너무 비싸거나, 그 옷을 입고 나갈 일이 없거나. 아웃렛 쇼핑백 대신 장바구니만 손에 들릴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돈 없는 취준생. 그나마 서울 하늘 아래 살 곳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언젠간 우리도 희재 언니처럼 뒤통수에서도 빛이 날 때가 있겠지.


합정동은 여러 모로 우리에게 딱인 장소였다. 옷을 좋아하는 희재 언니에겐 이대 홍대의 쇼핑거리가 가까워서, 요리를 좋아하는 윤 언니에겐 망원 시장이 가까워서, 고기를 좋아하는 내겐 소금구이 맛집이 가까워서. 생각만큼 맘껏 쇼핑을 하지도, 소금구이를 먹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반지하 투베드 룸. 집주인 아저씨는 세 사람이 계산하기 편하도록 35만 원 월세에서 2만 원을 깎아줬다. 퇴직한 은행장이라더니 역시 산수에 능했다.


- 탕! 탕! 탕!

- 언니, 돈가스가 아니라 묵사발을 만들려고 그래? 그만 해라.

- 탕! 탕! 탕!


윤 언니는 대꾸도 없이 칼 손잡이 끝으로 연신 돼지고기를 두드렸다. 집에 오자마자 시작된 요리는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신나게 영화를 본 뒤 아웃렛에서 시무룩해지더니, 장을 볼 때 즈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터였다. 순간 언니가 며칠 전 이력서를 낸 방송국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단 사실이 떠올랐다. 여태 아무 말이 없는 걸로 봐선 이번에도 그른 모양이다.


- 느그들 뭐하니?


명린 언니가 어색한 기류를 깨며 집으로 들어왔다. 거제도 사투리와 서울 말씨의 조합은 집 안에 흐르던 공기보다 더 어색하게 흘렀다. 제빵사 그녀는 종종 퇴근길에 남은 빵을 들고 우리 집에 들려 저녁을 얻어먹곤 했다. 내친김에 잠도 자고 가는 날도 허다했다.


- 역시 옥탑방보단 반지하지. 우리 집은 쪄 죽는데 여긴 선풍기도 없이 시원하네.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란다.

- 야, 시끄럽고 니 오징어나 썰어라.

- 명린 언니, 소보로 빵은 없어? 오늘은 피자빵 밖에 없네?


한바탕의 소란 끝에 빵가루를 입은 돼지고기가 기름에 올랐다. 윤 언니는 명린 언니가 썬 오징어를 김치에 넣고 버무렸다. 생오징어가 들어간 부산 김치가 참 맛있다고 생각할 때 윤 언니의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 부산이다, 부산. 느그들 조용히 좀 해 봐라.


윤 언니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야, 나 잘 지내제. 방송국 잘 다닌다. 억수로 바쁘다. 내가 일 적응하고 나면 집 한 번 내려갈게. 지금? 아직 퇴근 안했다. 어, 어? 나 또 회의 들어간다, 엄마. 내 전화할께. 급하게 전화를 끊은 윤 언니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암말도 말고 돈가스나 먹어라.

- 뻥은 뭐하러 쳐. 이미 저녁인데 퇴근했다 하면 되지.

- 암말도 말고 돈가스나 먹으라 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내려 깔고 윤 언니가 시키는대로 돈가스를 베어물었다. 그때였다. 찌이직. 정적 속에 신경을 자극하는 미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셋은 아무 말 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돈가스를 먹었다. 찌이익, 찍, 찍. 소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만큼 커졌다. 무언가 절퍼덕거리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이었다. 혹시 이건......


- 혹시 이건......

- 야, 느그 집에 쥐 있나?


윤 언니는 조심스레 일어나 안쓰는 찬장 구석을 살폈다. 쥐 한 마리가 끈끈이에 붙은 채 바둥거리고 있었다.


- 엄마야!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달려갔다. 끈끈이에 붙어 옴싹달싹 못하는 쥐가 따라오기라도 할 것처럼 문을 닫고 숨을 죽였다. 쥐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방문 틈을 타고 흘렀다. 얼마쯤 지났을까.


- 너네 밥 먹다 말고 어디갔어?


퇴근한 가장님이 돌아오셨다.


- 재희 언니! 끈끈이에 쥐가 붙었어!

- 그래서 지금 거기 숨어 있는 거야?


재희 언니는 후, 하고 한숨을 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찬장 문을 열었다. 찌이익. 비명을 지르는 쥐에게 이불이라도 덮어주듯 끈끈이를 절반으로 접더니 이내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역시 한 집안의 가장님은 달랐다.


- 야, 빨리 가장님 밥 가져다 드려.

- 돈가스 제일 큰 거 어딨어? 가장님 드리려고 남겨둔 거.


쥐 끈끈이를 처리하고 돌아온 재희 언니의 얼굴에선 광채가 났다. 아이 진짜. 니들 나 없이 어떻게 살려고 그래. 우리는 으쓱해진 그녀를 중심으로 저녁상에 둘러앉았다. 바싹한 돈가스 한 입에 오징어 김치 한 점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밥을 먹고 난 뒤엔 조그만 티브이 앞에 모여 깔깔거리며 웃다가 다 같이 잠이 들었다. 빈 방을 두고도 왜 그렇게 매일 밤 다닥다닥 붙어 잤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2003년 합정동. 

서울 뜨내기, 취업 준비생, 사회 초년생으로 점철되던 우리들의 모습. 그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우린 모두 방송국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물론 꽃처럼 아름다워진다거나 뒤통수에서 빛이 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웃렛 옷 한 벌을 사고 소금구이를 사 먹을 수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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