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May 18. 2020

창문 너머 누군가


#_


대학 정문 앞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술집과 음식점, 피시방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원룸 건물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추운 겨울 호주머니에 쏙 들어온 연인의 손처럼 따뜻함이 느껴지는 공간. 그래서 방세는 비쌌다.


대학 후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개발의 손길이 닿지 못한 밭두렁 길만이 좁고 길게 놓여 있을 뿐. 그 길을 따라 십여 분을 걷다 보면 불쑥 튀어나온 이층짜리 건물이 하나 보였다. 일 년에 150만 원. 여름에도 겨울처럼 썰렁한 기운이 감돌던 그 건물 102호에 순애와 내가 살았다.


- 진정한 영화학도는 장르를 가려선 안돼.


순애는 비장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비디오테이프를 내게 건넸다. 옥보단. 제목에서 왠지 모를 야함이 느껴졌다.


- 예술과 외설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거 알지? 그 차이를 배워야 진정한 예술을 만들 수 있어.


흔들림 없는 순애의 시선이 티브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녀는 무언가에 꽂히면 끝장을 봐야 했다. 봄부터 여름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체크 남방만 입는다던가, 팔도비빔면을 박스 채 사다 두고 먹는다던가 하는 것들은 애교에 불과했다. 술자리에선 모두가 뻗을 때까지 마시고 마셔야 직성이 풀렸고, 8월의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 피력할 때는 3박 4일이 부족했다. 심은하의 연기가 별로라고 말했던 동기 녀석은 한 달이 넘도록 지긋지긋한 순애의 반론을 들어야 했다. '네가 모르는 심은하의 매력은 말이야'를 백만 번쯤 듣고 나니 그녀의 매력을 진즉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호되게 욕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만큼 집념이 강한 순애였다.


매일 밤 야한 영화만 본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새벽에 깨보니 티브이 앞에 바싹 붙어 앉은 순애가 보였다. 누들누드를 보다 잠든 줄 알았던 그녀는 브라운관 속 엠마누엘과 마주하고 있었다. 순애는 또라이일까, 천재일까? 사뭇 진지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궁금증이 몰려왔다.


- 있잖아.

- 응.

- 사랑은 정말 이런 걸까?

- 응?

-사랑이...... 이런 거였어?


나는 대답 대신 이불을 덮고 누웠다. 등 뒤로 그녀의 사랑관에 대한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육체적 관계가 사랑에 주는 영향과 연인 사이 정신적 교감의 중요성, 그리고 자신은 플라토닉 러브를 내세운 최고의 로맨틱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그녀의 연설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며 생각했다. 순애는, 또라이임이 틀림없다. 


사건은 다음 날 벌어졌다. 강의를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 보니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이 보였다. 빗길을 뚫고 온 도둑의 족적으로 예측하건대, 화장실 창문을 넘은 뒤 변기를 발판 삼아 실내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방바닥이 지저분할 뿐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훔쳐갈 거라곤 팔도비빔면 밖에 없었으니 도둑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 엠마누엘. 엠마누엘이 안 보인다?


기르던 강아지라도 찾듯 순애는 나긋하게 엠마누엘을 불렀다. 야한 비디오만 사라졌다고? 내 시선은 본능적으로 베란다의 빨랫줄을 향했다. 어젯밤 걸어 둔 속옷 한 장이 보이지 않았다. 


- 변, 변태다! 네 엠마누엘이랑 내 빤스만 훔쳐간 변태라고!

- 미친놈. 훔쳐갈 거면 빤스만 훔쳐갈 것이지. 오늘 비디오 반납일인데 어떡하라고.


아, 이토록 현실적이라니. 순애는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구석이 있었다. 비디오 가게 주인 앞에서도 그녀는 꽤나 천연덕스러웠다. 글쎄, 그놈의 변태가 엠마누엘을 훔쳐갈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사장님도 아시지만 제가 반납일 미루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네? 2만 5천 원이요? 엠마누엘이 무슨 신작도 아니고. 2만 원으로 하시죠. 비디오 가게를 나오면서 앞으론 반대편 골목의 새 가게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인이 우리의 얼굴을 잊을 때까지. 


순애의 야한 영화 탐구 생활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배우는 것보다 변태의 재침입 방지가 더 시급한 까닭이었다. 집주인에게 화장실 철창 설치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건 창틀을 가로막을 수 있는 나무 막대뿐이었다. 어쨌든 변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 순애야...... 


선선한 바람이 불던 저녁. 활짝 열린 베란다 창문 너머로 우리를 지켜보던 어스름한 형체와 마주했다. 머리털이 빳빳해지는 순간 나는 가까스로 순애의 이름을 불렀다. 베란다를 등지고 앉아있던 그녀였지만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순애라면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하나, 둘, 셋.


-악! 이 놈의 변태가!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와! 악! 꺼져, 꺼지라고!


내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순애는 손에 잡히는 물건마다 베란다 밖으로 집어던졌다. 퍽. 운동화 한 짝이 변태의 얼굴에 명중했다. 이내 밭두렁 길을 따라 도망가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봇대 불빛 아래로 러닝셔츠 차림에 삼선 슬리퍼를 신은 아저씨가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작아지는 변태의 뒷모습을 보면서 순애는 꺼이꺼이 울었고, 나는 다리에 힘을 잃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2000년 겨울. 일 년 계약이 끝날 즈음에서야 집주인은 화장실과 베란다에 철창을 달아주었다. 총 스무 세대 중 오직 102호 만이 누릴 수 있던 특혜. 집념에 불탄 순애가 두 달이 넘도록 집주인을 쫓아다닌 결과였다. 그 사건 이후, 순애는 모든 창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비상시 집어던질 수 있는 여분의 신발들을 베란다에 쟁여두는 습관을 길렀다. 웃풍 때문에 등골이 서늘한 밤이면 창문 너머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자니? 어둠 속에서 순애가 물었다. 

아직. 이불을 코까지 덮은 내가 답했다. 

잘 자. 한참의 정적 끝에 다시 순애가 말했다. 

너도. 감기로 코가 막힌 순애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는 그 장단에 맞춰 숨을 고르며 잠을 청했다. 

그날 밤. 철창이 있어서, 순애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이전 02화 깜깜하지 않은 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