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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세팅된 머리, 가늘고 길게 뻗은 눈썹과 짙은 화장. 강주의 첫인상에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도도함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그녀는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며 스무 살 치곤 제법 큰돈을 만지다가, 뮤지컬 배우의 꿈을 이루고 싶어 뒤늦게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 오늘 저녁은 오징어짬뽕 먹을까? 네가 끓여주면 앙돼? 나 오늘 계속 손목이 아팡.
누워서 티브이를 보던 강주가 내게 혀 짧은 소리를 내었다. 대충 말아 올린 머리에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 강주는 눈썹을 지울 때마다 지니고 있던 도도함도 함께 지워버리는 모양이었다. 손목이 아팡, 하며 머리맡에 둔 과자봉지에 손을 넣는 그녀는 이제 어리바리하고 성가신 룸메이트일 뿐이다. 오징어짬뽕 좋아하시네.
- 거 좀, 옷은 벗었으면 잘 개어두고. 화장품들은 꼭 책상 위에 펼쳐둬야 해? 방 꼴이 이게 뭐냐?
- 괜찮아. 나중에 한 번에 치울게. 어차피 바퀴벌레들이랑 같이 사는 자취방이 청소해봤자지, 뭐.
자취 생활 3년 차.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푼돈을 모아 드디어 대학 정문 앞 신식 원룸촌에 입성한 해였다. 일 년에 280만 원이란 거금을 들였건만, 알고 보니 이 놈의 건물이 날림으로 후다닥 지은 빛 좋은 개살구였을 줄이야. 화장실 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볼일을 보는 새 절로 열리기 일쑤였고, 벽은 얼마나 얇은지 옆집 총각의 재채기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매일마다 출몰하는 바퀴벌레들이라니. 강주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보이는 족족 바퀴벌레들을 한 손으로 때려잡곤 했다.
- 오징어짬뽕 끓여 줄거지~이? 옥이랑 찐이도 곧 온다고 했는데. 많이 끓여줘.
콧소리까지 내는 모습이 가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가스레인지를 켰다. 냄비의 크기가 작아 주전자에도 물을 끓였다. 냄비 라면은 주인인 우리가 먹고, 주전자 라면은 빈대 친구들에게 주겠노라고 다짐하면서.
- 우리가 시간 맞춰 잘 왔네?
면발이 적당히 익어갈 때쯤 옥이와 찐이가 도착했다. 남의 집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냐고 핀잔을 줄려는데 옥이가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들을 꺼내 보였다. 유명 맛집을 운영하시는 어머니의 손맛. 덕분에 옥이의 라면은 주전자에서 냄비로 격상되었다. 찐이는 한편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풀었다. 가져온 옷가지로 보아하니 최소 일주일은 자고 갈 모양이다. 이 빈대들. 방 계약은 강주랑 둘이 했는데, 어쩌다 보니 룸메이트들이 셋이나 되었다. 하긴 바퀴벌레들이랑도 같이 사는데 뭐가 문제일까.
- 저 정도 개그는 나도 할 수 있는데 말이지. 야, 솔직히 내가 더 웃기지 않냐?
옥이 개그콘서트를 보다 말고 라면 속 김을 건져 앞니에 붙여본다. 얼마 전 떨어진 공채 개그맨 시험에 아직 미련이 남은 듯했다. 이번 학기 연극 워크숍의 연출을 맡은 찐이는 옥이의 어쭙잖은 개그에 '네가 떨어진 열 가지 이유'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라면을 다 먹은 강주는 슬그머니 익숙한 자리에 누워 먹다 남은 과자봉지에 손을 넣었다. 냄비와 주전자, 그릇 몇 개가 올라앉은 밥상은 자연스럽게 방구석에 버려졌다. 참자. 매번 견디지 못하고 밥상을 치우던 나도 이번엔 모른 척하기로 했다. 누구든 치우겠지. 세 사람의 대화는 옥이의 저급한 개그에서 찐이의 워크숍 계획으로, 그리고 다시 강주의 노래 실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깊어가는 밤. 나는 제일 먼저 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스멀스멀 기어 나올 바퀴벌레 걱정에 이리저리 뒤척이긴 했지만 말이다.
라면을 먹고 난 냄비와 주전자는 며칠 동안 싱크대에 방치되었다. 누군가 밥상을 치운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었다. 강주의 베개 주변으로는 빈 과자봉지들이 굴러다녔고, 방 안에는 옥이와 찐이의 소지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졌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설거지를 시작하려는데 냄비 안에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보였다. 참자. 들숨 날숨을 반복하는 동안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참자, 참......
- 야, 이것들아! 하나밖에 없는 냄비에 곰팡이가 피도록 아무도 설거지를 안 해? 응? 니들이 원시인이야? 퐁퐁 쓸 줄 몰라?
세 사람이 할 말을 잃고 당황한 사이, 나는 화를 삭이지 못한 채 집을 나와버렸다. 왜 그랬을까. 집주인은 난데. 이미 깜깜한 저녁인 데다 손에는 지갑 대신 곰팡이 핀 냄비가 들려 있었다. 갈 곳이 없어 무작정 걸었다. 대학 정문을 지나 도서관 주변을 돌다가 잔디 광장에 주저앉았다. 초여름의 저녁은 은근히 쌀쌀했다. 왜 집을 뛰쳐나와서 생고생인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기엔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머쓱했다. 순간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 너 어디야?
강주였다. 잔디 광장에 앉아 있다고 말하기엔 역시나 머쓱했다.
- ...... 잔디 광장.
- 꼼짝 말고 거기 있어!
화났나? 화가 났을 것이다. 제대로 한판 붙으려고 달려오는 중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가늘고 길게 뻗은 눈썹의 도도한 강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가 난 그녀는 어리바리하지 않다. 무섭다.
- 야!
잔디 광장을 향해 달려오는 세 명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언덕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몰아쉬고는 금세 나를 에워쌌다. 도망갈까.
- 그렇게 빽 소리만 지르다 뛰쳐나가면 어떡해? 우리가......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도망갈 걸 그랬다. 사과하는 강주도, 듣고 있는 나도 어색함에 절로 몸서리가 났다.
- 그러니까 사과하는 의미로 말이야, 우리 셋이 여기 잔디 광장 끝에서 끝까지 구르기로 했다. 저 끝 지점에 잘 도착하면 우리 용서하기다?
이건 웬 개그콘서트 같은 결말인지. 누구의 생각인지 안 봐도 뻔했다. 하나, 둘, 셋!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더니 비탈면을 내려가며 세 개의 점이 되었다. 이번에도 내가 졌다.
-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멈춰!
2001년의 여름밤. 잔디 광장을 뒹군 세 사람의 몸에는 잔뜩 풀독이 올랐다. 설거지를 하지 않은 값치곤 너무 비쌌다. 강주와 나의 잠자리 밑으로 여분의 이불을 깔고 누운 옥이와 찐이. 쓰리고 가려운 팔다리를 긁으며 힘들게 잠을 청하던 이들과 냄비 없이 홀로 주방에 남은 주전자, 그 사이 어딘가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을지 모를 바퀴벌레까지. 눈을 감으면 오히려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풀독에 바르면 좋은 로션이랑 큰 냄비도 하나 사야지, 하고 생각하는 동안 사르륵 잠이 내렸다. 그날 밤.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