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Jun 20. 2020

이모 껌딱지


#_


그해 겨울 내 손톱은 샛노랗게 물들었다. 누렇게 뜬 손바닥을 걱정한 아빠는 병원을 가보라 했고, 빈 귤 박스를 발견한 엄마는 조용히 내 등짝을 내리쳤다. 작작 좀 먹어라. 흘기는 엄마의 눈이 말했다. 나는 이불 안에 몸을 담그고 누워 하루 종일 귤껍질을 벗겼다. 하얀 실오라기까지 정성 들여 뜯어내고 천천히 귤의 맛을 음미했다. 오후의 침대 곁에는 주황색 껍질이 수북하게 쌓였는데 이불 속 내 발 끝은 여전히 시렸다. 2008년. 이상하리만치 추운 겨울이었다.


- 이모, 이제 우리랑 살아요? 다시 어디 안 가요?

- 희야, 이모도 어디 갈 수 있는 곳이 있었음 좋겠다.


나는 궁금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한 조카의 입에 귤 한 조각을 물렸다. 서른을 코앞에 두고 회사가 망했다. 모처럼 불려 나갈 결혼식도, 돌잔치도 없던 주말엔 남자 친구에게 불려 나가 뻥 차이고 말았다. 스물아홉, 무직, 싱글. 가진 거라곤 보잘것없는 이력서 한 장과 텅 빈 통장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나는 다섯 살 조카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 이모, 시집가지 말고 나랑 평생 살아요. 네? 내가 엄마한테 이층 침대 사달라고 할게요.

- 이모 시집가지 마?

- 이모 시집가지 마요.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놈, 실연당한 백수에게 시집가지 말고 평생 같이 살자니. 이층 침대를 힘겹게 오르는 백발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어른의 세계를 알리 없는 희야가 해맑게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본다. 이모야 뭐하니, 어서 귤을 내놓아라, 하는 표정으로. 그러면 나는 귤 하나를 더 까는 대신 그녀의 머리를 쫑긋하게 묶어준다. 내 기분에 따라 희야는 말괄량이 삐삐도 되었다가, 춘향이도 되었다가, 자다 깬 전인권이 되기도 한다. 정작 헤어스타일의 주인공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 아빠, 신나게 놀아줄 기운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대신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게 희야는 '이모 껌딱지'가 되었다.


- 할무니, 쌈장 말고 된장 주세요!


철퍼덕 퍼질러 앉은 희야 앞에 고봉밥이 놓였다. 한 손에 배추 잎을 든 채 입 안 가득 총각김치를 욱여넣는 꼴이 꽤나 볼만 하다. 전국에서 가장 쌈밥 잘 먹는 다섯 살이라고 해도 믿겠다.


- 희야, 유치원에서 점심 안 먹었어? 니 밥공기가 이모 것 보다 더 커.

- 그러는 너는 대낮까지 퍼질러 자고 밥이 넘어가?


네가 지금 내 귀한 손녀의 고봉밥을 논해? 그렇잖아도 마뜩잖던 딸내미를 보는 엄마의 시선이 곱지 않다.


- 시집은 안 가도 그만이야. 요즘은 그 뭐냐, 골드미스? 그런 사람들 많다며. 능력 있는 여자들. 근데 넌 만날 집에만 있으니 뭔 능력이 있겄어. 넌 스뎅이야, 이것아. 스뎅미스!


듣고만 있었는데 치열한 싸움에서 패한 듯 온몸이 아프다. 엄마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 갓 구운 생선 하나를 내 앞으로 내민다. 그래, 먹고 힘내자. 백수 생활도 건강이 우선이다.


- 뼈 잘 발라서 희야 밥에 얹어줘.


아, 내 앞에 놓였다고 다 내 것은 아니구나...... 쌈밥에 생선까지 먹은 조카는 넘치는 힘을 어쩔 줄 몰라 애꿎은 놀이터만 뱅뱅 돌았다. 그 사이에도 이모가 어딜 가진 않았는지 연신 고개를 돌려본다.


- 얘들아, 우리 이모야! 아줌마, 우리 이모예요!


조카는 누가 보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외쳤다. 우리 이모예요! 곧 아파트 단지 내에 희야 이모는 백수라고 소문이 자자할 판이다. 잔뜩 날을 세운 겨울바람이 희야와 함께 놀이터를 휘젓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 그 녀석은 뭘 하고 있을까. 찬밥 신세가 된 서러움 끝에 외로움이 세트처럼 밀려왔다. 이 시각이면 한창 바쁘겠네. 점심은 잘 챙겨 먹었나 몰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차인 것도 모자라 전남친 걱정을 하고 있다니. 나는 마음을 다잡듯 코트 자락을 단단히 여몄다. 그래도 그렇지, 안부 문자 한 통이 없어? 이런 냉혈한 같은...... 그러고 보니 내가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휑한 코트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다 그네를 타고 있는 조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의 연락을 피하기 위해 조카에게 미리 휴대폰을 건넨 사실이 떠올랐다.


- 희야, 이모 휴대폰 어디에 숨겼어?

- 비밀!


이모가 달라해도 주지 말고 꽁꽁 숨겨둬야 해! 희야는 그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 희야, 괜찮아. 이제 이모한테 말해도 돼. 우리 공주, 휴대폰을 어디에 뒀을까~요?

- 안 가르쳐 주~지!


망했다. 출렁이는 그네와 함께 희야의 곱슬머리가 나부낀다. 전설의 락커 저리 가라다.


- 희야가 휴대폰 돌려주면 이모가 매일마다 유치원 데려다줄게.

- ...... 원피스 입고?

- 분홍색 원피스 입고.

- ...... 화장하고?

- 예쁘게 화장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조카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리 감는 것조차 큰 결심인 백수에게 화장과 원피스라니. 하지만 별 수 없다. 희야가 이 패를 물어야만 한다.


- 아싸! 이제 이모랑 유치원 간다!

- 그래서 휴대폰은 어디 숨겼어?


집으로 돌아온 조카는 기세 등등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더니 물통을 꺼낸다. 왜지?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희야는 물통 뚜껑을 열고 손을 쑥 집어넣더니 무언갈 건져 올렸다.


- 이모 휴대폰 여기있~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색 물체. 분명 모토롤라 휴대폰이었다. 악!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폴더를 열어봤지만 손을 쓰기엔 이미 늦었다. 지인들의 연락처, 문자의 흔적, 기기 할부금...... 그 녀석의 연락처, 그 녀석의 흔적, 기기 할부금...... 모든 것이 날아갔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희야가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 이모, 내일 유치원 데려다줄 거죠? 원피스 입고? 화장하고?


그래, 그러자. 이모가 내일은 말괄량이 삐삐 머리도 해줄게.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한다. 희야가 하고 싶은 것, 다 들어주겠노라고. 조카는 거실을 한 바퀴 방방 뛰더니 티브이를 보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그리곤 이내 달콤한 낮잠에 빠진다.


내일은 아침 일찍 몸단장을 할 것이다. 희야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엔 휴대폰도 하나 사야지. 그 녀석의 연락처도, 그 녀석의 흔적도 없는 새 휴대폰.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다. 나는 거실에 앉아 조용히 귤껍질을 깠다. 하얀 실오라기를 뜯어내는 사이 엄마도 꾸벅꾸벅 졸음에 빠졌다. 뜨듯하게 끓고 있는 거실 바닥과 혼자서 떠드는 티브이, 졸고 있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손녀딸. 문득 이 풍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백수가 아니었으면 몰랐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마지막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이전 06화 언덕 위의 빌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