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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ul 02. 2020

창문 밖의 자유


#_


3월의 시드니는 반팔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에 딱이다. 오페라하우스를 시작으로 보타닉가든을 지나 세인트 메리 성당에 들려 1불짜리 초를 밝힌다. 주님, 2천 불로 1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리곤 조금 고민하다 1불짜리 초를 하나 더 밝힌다. 주님, 기왕이면 귀도 트이고 말문도 트이게 해 주세요. 나는 봉헌 촛불이 사그라질 때쯤 거리로 나왔다. 하루 종일 걸은 까닭에 발바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 1,998불만 수중에 남았다. 2009년. 딱 서른이 된 해였다.


- 아유, 언니! 여긴 한국이랑 비교가 안돼요. 이 햇살, 하늘, 바다! 그리고 자유! 남 의식할 필요 없이 언니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게 호주라구요. 땅 덩어리는 또 얼마나 넓어. 한국처럼 복작이지 않아 좋고. 언니도 저처럼 삼 년쯤 살다 보면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자신감에 찬 영미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도 맑고 또렷해서 손으로 만져질 듯하더니 이내 아스라이 사라진다. 영미는 시드니 시티 한복판의 고층 콘도, 15층의 마스터 베드룸, 그중에도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뜨내기가 많은 곳에서 삼 년을 살다 보니 방 안의 명당은 자연스레 그녀의 공간이 되었다. 매일 밤 영미와 나는 이층 침대의 위아래에서 비슷한 자세로 잠이 든다.


- 영미? 걔 얘기 들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삼 년을 살면 뭐해. 시드니 시티도 벗어난 본 적 없을걸?


좀처럼 모습을 보기 힘든 은이와 마주쳤다. 쓰리잡을 뛰는 그녀는 맞은편 이층 침대의 아래 칸에 산다. 오늘은 경기장 청소 알바와 스시 레스토랑 알바 사이에 짬이 생긴 모양이다.


- 어학원 결석도 엄청 잦아서 학생비자에 문제 생길 거라고 경고받았잖아. 만날 집에만 있을 거면 호주는 왜 왔나 몰라.


은이는 속사포처럼 빠른 말투와 높은 톤의 목소리를 지녔다. 영미가 없는 방에 나와 단둘이 남은 것이 흔치 않은 기회라 여긴 듯했다.


- 하여튼 걔 조심해. 손버릇이 좀 안 좋다고 해야 하나? 남의 물건 함부로 쓰는 건 기본이고 종종 자잘한 것들이 없어지기도 한다니까. 물론 물증은 없어.


그래도 심증은 확실하지. 은이는 눈빛으로 마지막을 대신했다. 영미가 오해를 받고 있는 거라면 어쩌나 싶은 안타까움과 조심할 만큼 값비싼 물건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창 밖으로 해가 뉘엿거리는 동안 세 번째 알바를 하러 나가는 은이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영미가 바통 터치를 했다. 이층 침대 두 개와 네 개의 책상으로 꽉 찬 방 안의 풍경은 절경을 감상할 때완 또 다른 이유로 내 심장을 멎게 한다. 은이마저 방 안에 있었다면 숨 쉴 공기도 부족했을지 모른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맞은편 이층 침대를 바라보았다. 작은 트렁크 하나와 박스 하나가 삼일 째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새 룸메이트는 오늘도 클럽이 문을 닫는 새벽에나 들어올 모양이다. 나는 자세를 고쳐 등을 깔고 눕는다. 이번엔 낮게 깔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리 하나가 일주일에 130불이라니. 아래 칸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영미의 인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국처럼 복작이지 않아 좋다던 호주. 영미에게 세 명의 룸메이트들이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 전 여기 오래 안 있을 거예요. 딱 이주일만 있다가 농장 일자리 찾아 떠나려고요. 돈도 많이 벌고 워킹홀리데이 세컨 비자도 받고. 근데 여기 생각보다 놀게 많네요? 농장 가면 클럽 못 다녀서 어떡하지......


단발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아이가 자신을 미영이라 소개했다. 영미와 미영. 앞뒤만 바뀐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이른 아침 창가의 커튼을 치느냐 마느냐로 이미 한바탕 벌인 사이다. 미영은 방을 렌트한 지 나흘째가 되어서야 트렁크를 열고 짐을 풀기 시작한다. 


- 언니, 이거 넘 예쁘죠? 향기는 더 좋아요. 여긴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종류들도 진짜 많은 거 있죠?


미영이 미니어처 향수병을 하나씩 꺼내보였다. 우와, 이쁘네. 향기라고는 섬유유연제 밖에 모르는 내가 어색한 맞장구를 치자 미영이 손수 내 목덜미에 향수를 뿌려준다. 어느새 그녀의 작은 책상 위엔 향수병들이 즐비하다.


- 한국 돌아갈 때는 가방 한가득 향수병으로 채워 갈 거예요.


탁! 탁!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영미가 거칠게 창문을 열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 냄새도 강한 걸 꼭 방 안에서 뿌려야 해? 


또렷하다 못해 날이 선 영미의 목소리가 코라도 벨 듯 서늘하다. 폭풍전야. 서로에게 눈을 흘기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애꿎은 목덜미만 뻣뻣하게 굳어갔다. 너무 강해? 금방 씻고 나올게. 나는 수건을 꺼내 들고 화장실로 피신한다. 살갗이 벌게지도록 닦고 또 닦는다.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분위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한 달 같은 일주일이 흘렀다. 시드니 시티 한복판의 고층 콘도, 15층 마스터 베드룸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책상에 두었던 10불을 잃어버린 은이가 영미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미영이 그 편을 든 것이다. 늘 집을 비우는 우리와 달리 영미는 항상 방구석에 은둔해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평소 손버릇이 좋지 않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들에 따르면 영미는 은이의 귀한 식재료를, 미영의 값비싼 샴푸를 제멋대로 쓰고 있었다. 영미의 신경도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은이가 청소를 하지 않는다던가 미영이 새벽에 시끄럽게 귀가한다던가 하는 문제들이 싸움의 도마 위에 올랐다. 어쩌다 세 사람이 모두 방에 있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수건을 꺼내 들고 화장실로 피신했다. 이 햇살, 하늘, 바다! 그리고 자유! 몸을 씻고 있노라면 영미의 말이 종종 떠올랐다. 쳇,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네. 시드니 시티 한복판의 고층 콘도. 이곳 15층의 마스터 베드룸엔 개인의 자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 빨리 내놔! 내놓으라고!


사달은 며칠 후에 일어났다. 이른 아침의 기운을 가르는 비명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 농장으로 떠난다던 미영이 짐을 싸다 만 채 영미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육박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뭐가 됐든 그냥 줘라, 제발. 몇 시간만 참으면 평생 안 볼 사이 아니냐...... 할 수만 있다면 내 짐을 싸서 떠나고 싶다. 나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돌아눕는다. 


- 내 향수 어디다 숨겼어? 세 개나 없어졌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아? 

- 그니까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고?

- 그럼 도둑년한테 묻지, 누가한테 물어?


도둑년? 쿵! 무언가가 부딪힌 여파로 이층 침대가 출렁였다. 자세를 고쳐 앉고 내려다보니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있었다. 미영은 영미의 긴 머리채를 잡았고, 영미는 미영의 안경을 잡아 던졌다. 야, 그만해! 그만 하라니까! 궁여지책으로 소리를 질러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침대 앞에서 엉겨 붙은 두 사람 덕분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닥보다 천장이 가까운 내 자리는 쓰나미가 목전에서 벌어진 작은 섬과 같았다. 나무아미타불...... 나일론 가톨릭 신자의 입에서 저절로 염불이 새어 나온다. 이 지랄도 곧 지나가겠지. 


두 사람의 육박전은 다리가 부러진 안경과 수챗구멍에서나 보던 엄청난 양의 머리카락을 남겼다. 나는 어학원을 갔다가 달링하버에서 하이드 파크, 세인트 메리 성당까지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더 이상 갈 곳이 떠오르지 않을 때쯤 내키지 않는 귀가를 했다. 방 안은 고요했다. 미영은 떠났고, 은이는 그날의 세 번째 알바 중이었다. 오직 영미만이 평소처럼 15층 마스터 베드룸을 지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줄어든 그녀가 침대에 누운 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영미의 호주는 하얀 창틀 안에 갇힌 높은 건물들과 클럽이 즐비한 사거리의 풍경이다. 새벽 알바를 마친 은이가, 밤늦게 클럽을 나서는 미영이 걸었을 거리. 영미는 그 창틀 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사거리 저 너머 자리한 넓은 바다와 자유를 보았을까. 영미 말처럼 나도 삼 년쯤 살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등장 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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