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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Aug 04. 2020

헬로, 영 레이디


#_


그는 하얀 셔츠를 즐겨 입는다. 소매는 절반쯤 걷어 올리고, 단추는 세 개 정도 풀어 곱실거리는 가슴 털이 설핏 보이도록 한다. 조금 지나치다 싶게 크고 화려한 시계가 그 모습과 묘하게 어울린다. 그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Speedy Internet Cafe'를 운영하지만, 이름만큼 스피디하지 않은 인터넷 속도 탓에 대부분의 시간을 한가로이 보내곤 한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컴퓨터가 익숙지 않아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이거나 당장 프린터가 필요한 학생, 혹은 잡담을 하기 위해 모여든 주변 가게 주인들 정도다. 그들의 발길마저 끊기는 오후가 찾아오면, 그는 가게 앞의 볕 좋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어쩌다 상대방과 눈이 마주칠 땐 씨익, 능글맞은 웃음도 건넨다. Hello, young lady.


- 나 오늘 시티에서 Andre 봤다? 어떤 여자랑 커피 마시고 있던데?

- 그래? 또 새로운 영 레이디를 찾았나 보네.


승은은 Andre가 없는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켰다. 대자로 누워있는 모습이 꼭 해변가 바위에 붙은 불가사리 같다. 평소 룸메이트들은 거실에서 어울리기를 꺼려했다. 한 구석에 커튼을 치고 생활하는 Andre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커튼 너머 공용 공간을 독차지하기 일쑤였고, 혹 누군가 티브이를 볼라치면 시끄럽다고 불평을 해댔다.


- 그러면 세컨 룸을 자기가 쓰던가. 렌트 잔뜩 해서 돈은 벌고 싶고, 거실에 살면서 손해 보기는 싫다 이거지.


정이는 Andre가 잔소리를 할 때마다 잠자코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나 오늘 꼭 보고 싶은 티브이 쇼가 있단 말이야. 시끄러워? 넌 왜 그렇게 일찍 자니? 귀마개라도 구해줘? 낯을 가리는 승은과 영어가 부족한 나와 달리 그녀는 늘 거침없었다. 정이와 Andre. 두 사람이 마주하면 종종 불꽃이 튀었다.


- 아무튼 영 레이디랑 잘 돼서 집에 늦게 들어왔음 좋겠다.


정이가 방금 만든 파스타를 우리에게 건네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해물이 아낌없이 들어간 것이 꽤 먹음직스럽다. 식탁이 아닌 거실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다니. Andre가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 맥주 캔을 따는 승은을 보며 나도 파스타를 한 입 먹어본다. 그가 아끼는 카펫에 토마토소스 한 점 떨구는 상상을 하면서. 아, 맛있다.


나 역시 시드니 시티에서 몇 번인가 그와 마주친 적이 있다. 타운 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때를 제외하면 늘 여자와 함께였다. 그가 영 레이디라 부르는 여자들. 인종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호주가 낯선 사람들, 영어가 어려운 사람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들과 같은 부류일 땐 더더욱. 그는 나에게도 영 레이디라는 호칭을 쓰곤 했다.


- 생각해보면 무섭지 않아? 우리는 Andre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데, 걔는 우리 여권 정보까지 다 요구했잖아.

-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말 안 해주는 거 보면 이상해. 뭔가 쓸데없이 숨기는 게 찝찝하단 말이야.

- 이탈리안 아니야? 나한텐 오래전에 이민 왔다고 했는데?


응? 나한텐 프렌치라고 했는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승은은 그에게서 그리스의 느낌이 난다고 했고, 정이는 악센트로 보나 생김새로 보나 이란, 혹은 그 어디쯤에서 왔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몇몇 나라들을 입에 올리며 그의 고향을 추측했지만 이내 관심을 잃고 말았다. 그거 알아서 뭐해. 그러게. 정이는 좋아하는 티브이 쇼로, 승은은 맥주로, 나는 해물 파스타로 눈길을 돌렸다. 우리에겐 그가 없는 동안 집을 집답게 누리고 그 흔적을 지우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Andre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방음이 완벽하지 않은 건물 덕에 계단을 따라 반 층 내려가야 있는 마스터 베드룸에서도 두 사람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뭐야, 우리 보곤 친구도 데려오지 말라더니.

- 차라리 잘됐어. 저 여자랑 데이트하느라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오면 좋지.

- 그러다 만날 집에서 데이트하면 어떡해?


승은의 말이 씨가 되었다. 이주일 뒤 주말 아침, 영 레이디가 트렁크 하나를 끌고 우리 집에 왔다. 가볍게 여행을 떠나듯, 그렇게.


- 인사해. 앞으로 우리랑 같이 지낼 거야.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방을 빼야 한다지 뭐야.


하이. 영 레이디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거실 구석의 커튼을 열었다. 현관과 계단 사이의 좁은 공간에 놓인 침대와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Andre의 화려한 시계와 상반되는 조촐한 광경이었다. 앞으로 같이 지낸다고? 얼마 동안이나? 급한 사정이 마무리되면 나가는 거야?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Andre는 나를 좋아했다.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를, 예스와 오케이를 즐겨 쓰는 나를. Such a good girl이란 말을 들으면 어쩐지 불쾌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이는 달랐다. 예스와 오케이 말고도 할 말이 많았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했고, 부당한 일에는 반박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레이디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저녁 여덟 시 이후엔 거실과 주방을 사용하지 말아 줘. 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영 레이디가 김치 냄새를 못 참겠다네. 냉장고에서 치워줄래? 우리와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영 레이디의 입김은 거셌다. 그녀가 Andre의 귀에 불어넣은 속삭임은 그의 입을 통해 폭탄처럼 터졌다. 펑, 펑, 펑. 셀 수 없는 말다툼 끝에 수줍음 많은 승은은 조용히 얼굴을 붉혔고, 영어가 부족한 나는 할 말을 잃었으며, 거침없는 정이는 전의를 상실했다. 영 레이디는 하루 종일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거나 발코니에 나가 일광욕을 즐기며 그와 우리의 전쟁을 지켜봤다. 


- 어쩌겠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지.


싸움에 지친 우리는 이사를 계획했다. Oh, you all moving out at the same time? 그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더 일찍 말해줘야지. 한 달은 부족해. 이사 올 사람을 바로 구하지 못하면 곤란하다고. 그리고...... 


- I cannot give you guys depoit back. 


여기 페인트가 벗겨졌네. 책상에 흠집이 났어. 화장실도 더럽고. 보증금은 돌려줄 수 없겠는걸. 갖은 핑계를 대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럴듯한 계약서 한 장 작성하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어차피 이 모든 것은 불법 아니었던가. 우리는 억울하지만 훌훌 털고 나오는 게 속 편할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 문제는 이사를 며칠 앞둔 밤이었다. 


- 언니, 빨리 집에 와 봐! 큰일 났어!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승은이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집에 도둑 들었어! 워홀러들 사는 방에 훔쳐갈 게 얼마나 된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나는 집을 향해 뛰고 있었다. 달링하버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저 앞으로 경찰차 한 대가 보였다. 


- 참 나, 이게 말이 돼? 


정이는 경찰을 돌려보낸 뒤 침대에 주저앉았다. 난장판이 된 방과 온갖 짜증이 섞인 그녀의 표정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노트북 세 개와 현금 350불, 그리고 정이의 여권이 사라졌다. 책상 위에는 승은이 미처 입금하지 못한 수표 한 장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Andre와 영 레이디는 평소답지 않게 집을 비웠고, 도둑은 오직 마스터 베드룸만 노렸다. 경찰도 알고 우리도 아는, 심증은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 깜깜한 밤, 활짝 열린 발코니 문을 통해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완전 범죄의 현장이었다.


- 빠진 거 없지? 


드디어 이삿날. 각각 트렁크 하나에 백팩 몇 개면 끝날만큼 조촐한 이삿짐이었다. 경찰이 다녀간 이후 Andre와 영 레이디는 우리와 마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덕분에 이삿날까지 그들을 보지 않아 좋았다. 


- 잠깐만.


막 집을 나서려는 찰나, 정이가 주방으로 돌아가 소금을 꺼냈다. 훠이, 훠이! 귀신이라도 쫓듯 우리의 몸에 몇 차례 소금을 던지고는 거실 바닥에도 뿌렸다. 재수 없어! 승은과 나는 킥킥 웃어대면서도 소금 세례를 마다하지 않았다. 


-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도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 햇볕에 널려 있는 하얀 셔츠 한 장을 가져왔다. 가위를 찾아 소매 한쪽을 싹둑 잘랐다. 곧 여름이니 다른 한쪽도 마저 잘라 입으라지. 나는 Andre가 하얀 셔츠를 입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호주가 낯설고, 영어가 어려운 사람들을 골라 능글맞은 웃음을 건네는 모습을. 


나는 식탁 위에 반납할 키와 하얀 셔츠를 가지런히 놓고는 마음 속으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Wish you the best. From young lady.


2009년 10월. 달링하버의 집을 떠났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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