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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Aug 23. 2020

그저 그런 사이의 쓸쓸함


#_


- Michelle이라고 하던데, 알아?


Brandon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상체가 테이블 위에 얹어진 모양새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솟구치는 짜증을 삼켰다. 


- 몰라. 친구랑 간다고만 들었어. 내가 유니 친구들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 난 Michelle이란 친구를 본 적이 없어.

- 나도. 


Sorry. 잘못한 일이 없는데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의 저녁, Brandon은 기어코 나를 집 앞 커피숍까지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랑 떠난 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남자라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그를 보면서 나는 한 시간 전 나 자신을 쥐어박고 싶어졌다. 왜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냐고. 유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할 마음도 없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영어 튜터와의 수업을 듣는 것 마냥 피곤함이 쌓였다.


- I don't think I can help you. 


나는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도 내게서 딱히 얻을 게 없어 보였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뭐라도 먹어야겠는 걸. 나는 후다닥 떡볶이 소스를 만들어 삶은 스파게티 면과 함께 버무렸다. 고추장과 스파게티의 조화. 유니에게 배운 뒤 곧잘 써먹는 간편식이었다. 어려서 백인 할머니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그때 매일 밤 혼자 이렇게 해 먹었어. 이사 첫날, 그녀는 배실배실 웃으며 고추장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야, 하면서.  


우리는 일 년 전 인터넷 카페를 통해 처음 만났다. 오타와에서 이사 온 유니가 룸메이트를 찾는 글을 올렸고 내가 댓글을 달았다.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주방 겸 거실. 밴쿠버에서 하우스의 반지하를 렌트하는데 드는 한 달 비용은 880불이었다. 운이 좋아 시세보다 저렴한 값에 구하기도 했고, 유니가 억척스럽게 20불을 깎은 덕도 있었다. 서른이 넘어 빈털터리 유학생이 된 내겐 그마저도 벅찬 금액이었지만 말이다. 


후루룩. 면발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익숙한 고요함이었다. 유니는 종종 집을 비우곤 했으니까.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칠 때마다 한국을 방문했고, 학기 중에도 종종 여행을 다녔다. 남자 친구인 Brandon이 노심초사하는 것도 며칠 전 그녀가 LA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니는 집을 비울 때마다 그와의 연락도 끊는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룸메이트까지 소환해서 뒤를 캘게 뭐야. 괜스레 기분이 찜찜했다. 그녀가 혼자인지 동행이 있는지, 있다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우리는 각자의 사생활을 시시콜콜하게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서먹하지도 친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사이. 그 간극을 좁힐 계기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 집에 10억이 없는 사람도 있어?


언젠가 10억 쯤의 자산은 있어야 중산층이라는 기사를 보고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세상에, 10억이나 있어야 해?라는 나의 반응에 그녀는 10억이 없다고?라고 응답했다. 동그랗게 뜬 눈이 너무 맑고 투명해 유니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렌트비 20불을 깎는다고 해서, 장을 볼 때 세일 상품만 고른다고 해서 나와 똑같은 형편일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세상엔 나보다 훨씬 덜 가진 자도, 더 가진 자도 존재한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 으음, 그럼 있지...... 당연히. 

- 하긴, 있겠지? 에이, 그래도 많진 않을 거야. 10억도 없이 어떻게 살아.


문득 월급날이 언제인지조차 모르던 전 직장 동료가 생각났다. 콩 한쪽을 나누듯 월급을 쪼개 방세를, 카드값을, 학자금을 낼 일이 없던 그에게 월급 통장은 꼬박꼬박 쌓이는 용돈 같은 것이었다. 그도 이 기사를 보면 똑같은 표정을 지을까? 요즘 돈도 아니라는 10억을 가지지 못한 부모님의 얼굴도 스쳐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와 나 사이에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간극이 생긴 것은. 그리고 그 틈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열등감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밴쿠버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사람들은 새벽같이 떠서 한밤중이 돼서야 가라앉는 여름의 해를 사랑한다. 길고 긴 어둠과 멈추지 않는 비를 견디고 만나는 여름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그 넉넉한 낮의 시간 동안 나는 학교를 마치고, 시내를 구경하고, 도서관이나 공원을 거쳐 집에 돌아오곤 했다. 


유니가 여행을 떠난 지 삼일 째, 집 근처에 세워진 익숙한 차 한 대를 발견했다. 차체가 낮고 가운데에 하얀 줄이 새겨진 것이 Brandon의 것과 흡사했다. 그가 왜? 유니가 언제 돌아오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비슷한 차일 거야. 평소처럼 집안으로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틀 뒤에는 모처럼 비가 내렸다. 나는 하릴없이 학교가 끝난 이른 오후부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문을 열고 앞마당을 지나는데 한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우스를 끼고 코너를 도는 순간,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 쓴 남자가 후다닥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십 년이 넘는 자취 생활의 내공에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속옷을 훔쳐간 변태도, 노트북을 훔쳐간 집주인도 겪어봤지만 이런 일을 또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층에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하나? 경찰부터 부를까? 하지만 도둑은 일을 벌이지도 못하고 도망간 상태였다. 잠금장치가 풀린 유니 방의 창문에선 커튼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Brandon...... 


- 무슨 소리야? 나 걔랑 헤어졌는데.

- 뭐? 언제?

- 여행 가기 전에. 좀 질척거리긴 했지만......


지금 질척거리는 수준이 아니라고. 내가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어가자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니의 휴대폰이나 노트북, 혹은 다이어리 같은 것들을 훔치려 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와 헤어졌는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게 무엇이든 그는 알고 싶었을 것이다. 지난 이틀 밤. 나는 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그의 목적과 나는 거리가 멀었지만 검은 후드티를 입은 뒷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 그래? 뭐야, 완전 미친놈이네! 그래도 집안에는 못 들어왔지?

- 응.

- 그럼 다행이고. 난 어차피 담달에 한국 갔다 오니까 괜찮을 거야. 이사 가버리면 그만이지.


유니는 입을 삐쭉 내밀더니 자신의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LA의 해변가에서 찍은 사진들이 슬라이드로 지나갔다. 내가 불안에 떠는 동안 그녀가 만끽했을 즐거운 시간들이. 


- 넌 아무렇지도 않아?

- 짜증 나지. 근데 뭐, 어쩌겠어. 그냥 똥 밟은 셈 치는 거지. 그런 애들은 건드리면 더 난리 난다니까.

- 난 무서워서 혼자 잠도 못 잤어...... 

- 응?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몰랐다는 듯이 맑고 투명한 눈. 


- 그랬어?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미안하게 됐네...... 어차피 집 계약은 month to month니까 같이 방 빼자. 네가 정 찝찝하다면 말이야......


그때 깨달았다. 우리 사이의 간극은 나의 열등감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저 맑고 투명한 눈엔 배려와 공감이 담겨있지 않음을. 그래, 나도 바로 새집 알아볼게. 너 한국 가기 전에 먼저 이사 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차가워지는 말투를 애써 진정시키고 방으로 돌아왔다. 분명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으니.


2011년 여름의 밴쿠버. 방문 틈새로 거실의 불빛이 가늘게 새어들었다. 나는 불현듯 10억이 없어 중산층이 될 수 없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따뜻한 가족이 그리운 밤. 혼자가 아니었지만 혼자 잠들 때보다 더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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