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Aug 16. 2020

베드 버그의 추억


#_


This way, please. 집주인의 깍듯한 안내를 받으며 로비에 들어섰다. 룸 렌트, 이주일에 200불, 독방. 말도 안 되는 광고를 보고 단숨에 달려온 터였다. 시드니 시티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곳에 내 방을 갖게 될 줄이야. 온갖 기대를 안고 현관문을 열자 하얀 커튼이 눈 앞에 펼쳐졌다. 넓은 거실은 그 커튼을 통해 여섯 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뉘었다. This is your room. 집주인이 커튼을 젖히자 싱글 침대 하나로 꽉 찬 공간이 보였다. 이게 방이라고? 6인 병실이라 해도 믿겠다. No, thanks. 뒤돌아 나가려는데 길게 늘어진 커튼이 팔다리를 감기 시작했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집주인의 괴성이 들렸다. THIS. IS. YOUR. ROOOOOM!


눈을 떠보니 사방이 깜깜하다. 참 나, 별 꿈을 다 꾸네. 입맛이 쓰다.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방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책장, 둥근 탁자, 창문 옆 싱글 침대, 그 위에 등을 보인 채 자고 있는 남자 하나. 남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다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아아, 택수가 돌아왔구나. 


- 여자 방은 꽉 찼는데 제가 쓰는 방이 비어요. 원래 남자 셋이 쓰지만 지금은 저 밖에 없거든요. 


어차피 전 집에 잘 없어요. 자신을 매니저라 칭한 택수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방문을 열었다. 곱게 정돈된 이부자리와 은은하게 퍼지는 페브리즈 향이 인상적이었다. 거실에만 6명이 살고 있는 집을 보고 온 터라 이 정도면 과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저렴하되 인간의 기본적인 삶은 보장될 것. 귀국에 앞서 잠시 머물 곳을 찾던 내가 정한 최소한의 조건을 가뿐히 넘는 곳이었다. 하지만 남자 룸메이트라......


- 이주일 치 디파짓 지금 드리면 되죠?


남녀 공용 호스텔쯤이라 생각하지, 뭐. 나는 그 자리에서 삼백 불을 건네고 이틀 뒤 이사를 했다. 큰 짐은 이미 한국으로 부친 뒤라 작은 트렁크와 백팩 하나가 전부였다. 그 단출함에 택수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만난 가장 깔끔한 룸메이트. 필요하다면 그에게 추천서라도 써주고 싶었다. 


- 누나, 어제 혹시 모기 물렸어요? 난 엄청 가려운데.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택수가 나를 향해 다리를 내밀었다. 복사뼈 위로 무언가에 물린 듯한 빨간 자국이 줄지어 보였다. 어제 모기가 있었나? 글쎄. 네 피가 달달한가 보지.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호응을 얻지 못한 택수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양상추 샐러드에 예쁘게 썰은 파프리카를 얹고 토스트를 굽는 그의 손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작지만 다부진 체형과 달리 유독 고운 손은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도 보였다. 위로 누나가 셋이라고 했던가, 넷이라고 했던가. 귀한 아들보단 온 식구가 부려먹는 머슴 같은 역할이라고 했던 말은 기억난다. 택수는 군대를 제대한 뒤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주 워킹을 택했다. 누나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학비는 비싸지, 취업은 어렵지. 공무원 시험 준비는 아무나 하나. 것도 버틸 돈이 있어야 하죠. 집에 비빌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일 년 동안 오지의 농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세컨 비자를 받았다. 두 번째 해에는 시드니로 돌아와 새벽까지 이어지는 청소일을 했고, 주인 대신 집을 관리하며 방세를 절약했다. 워킹만 있고 홀리데이는 없었지만 돈은 금방 모였다. 그리고 작년, 택수는 시드니의 한 요리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이민만 하면...... 그는 무슨 말을 하든 항상 '이민만 하면'으로 끝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 이민만 하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집 짓고 살거에요. 

- 그래.

- 코리안 퓨전 레스토랑 하나 작게 열고.

- 그래.

- 진짜 이민만 하면......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택수가 토스트 한쪽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학비랑 생활비 벌려고 새벽까지 아등바등 일하지 않고, 놀러도 다니고 즐길 줄도 알면서 그렇게. 나와 마주친 그의 눈이 꽤나 진지해 보였다. 그래, 네가 이민만 하면.


- 뭐, 적어도 여긴 시급이 세잖아요. 한국에선 똑같이 일해도 학비도 다 해결 못했을 거야 아마. 


택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샐러드와 토스트를 해치우고는 집을 나갔다. 그는 내가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 아침을 챙겨 먹고 학교를 갔다가 늦은 알바를 끝내고서야 집에 돌아오는 하루.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은 어디에나 있다. 한국이든, 호주든, 세상 그 어디든.


그날 밤은 택수의 뒤척임에 잠이 깼다. 낡은 목조 침대는 그가 오른쪽에서 왼쪽,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누울 때마다 억눌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끼익, 벅벅. 끼익, 벅벅. 그는 잠에 취한 채로 연신 팔다리를 긁어댔다. 모기가 있을만한 날씨는 아닌데...... 피가 달기로는 나도 나름 유명하거늘 유독 택수만 물리는 것도 이상했다.


- 아우, 진짜! 


그가 벌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나마 남아있던 잠조차 달아나버렸다.


- 택수야...... 야, 괜찮아?


묵묵부답. 아무리 가려워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온몸을 긁으며 자고 있는 택수를 보고 있자니 내 몸까지 슬슬 가려워졌다. 내일은 모기약을 사 올까. 나야 며칠 뒤면 한국으로 돌아갈 테지만 택수는 매일 모기와의 전쟁을 벌일 판이다. 불쌍한 녀석. 네 피가 단 덕분에 내가 살았다. 


언제 다시 잠들었을까. 눈을 떠보니 사방이 환하다. 진즉 중천에 올라앉은 해가 방안의 모든 것을 낱낱이 비추고 있었다. 책장, 둥근 탁자, 창문 옆 싱글 침대, 그리고 그 위에 등을 보인 채 앉아있는 택수까지. 택수? 이 시각에 왜 집에 있지?


- 오늘 학교 안 가?


아우, 진짜...... 대답 대신 짜증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세히 보니 택수의 다리가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줄을 맞춰 빼곡히 물린 자국들은 보기에도 흉측했다. 


- 누나, 이거 베드 버그...... 베드 버그 같은데...... 너무 가려워서 미치겠어.


택수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어깨도 살짝 들썩였던 것 같다. 울어? 너 지금 우는 거야?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내가 시드니 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는데...... 지각, 결석 없이 학교 다녔는데..... 


그가 등을 돌린 채 고개를 털었다. 아니, 눈물을 털었다. 


- 내가 진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 베드 버그 때문이란 게, 그게 너무 열 받아서...... 


그러게. 이 방처럼 깔끔한 곳이 어딨다고 베드 버그가 생겼을까. 다 큰 남자의 울음을 처음 목격한 나는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니까 말이야......


- 네가 이민만 하면...... 

-......

- 네가 이민만 하면, 이거 다 재밌는 일화가 되는 거야. 삼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는데 베드 버그 때문에 처음 휴가를 썼다고. 나중엔 이게 다 추억이라니까? 


벅벅. 택수가 아무 말 없이 다리를 긁었다. 도움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인 모양이다. 이럴 시간에 방안의 짐을 빼서 소독하는 편이 나을 걸 그랬다. 나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택수는 베드 버그를 핑계 삼아 울고 싶은지도 모른다. 쉼 없이 쳇바퀴를 굴리느라 지쳐있었는지도. 나는 고개를 털던 그를 떠올리며 자연스레 팔꿈치를 긁었다. 어제까지 없었던 붉게 물린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나중엔 이게 다 추억이라니까?


2010년 2월. 

택수가 처음으로 학교도, 알바도 가지 않은 날. 

우리는 베드 버그 퇴치를 명목으로 하루종일 일광욕을 즐겼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이전 10화 헬로, 영 레이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