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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Aug 31. 2020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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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늦은 시각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다 헤어진 날이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출발한 트레인은 금세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출입문 가까이 자리를 잡고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자 문득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돌아가는 길의 끝에는 익숙한 우리 집과 다정한 식구들이 있어야 하는데. 향수병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훅 나타나 잽을 날리곤 했다. 어쩌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담. 스스로를 타박하는 사이 트레인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방향을 틀었다. 깜깜한 창 밖으로 하얗게 네온 불빛을 뿜는 십자가가 보였다. EAST VAN. 어둠 속의 글자는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다. 집이다. 집에 다 왔다.


Commercial Drive. 이스트 밴 표지판 너머로 펼쳐진 이곳을 사람들은 흔히 이탈리안의 거리로 기억한다. 화덕 피자가 맛있는 레스토랑과 유러피안 그로서리 스토어가 있는 곳. 힙스터들은 독특하고 감각 있는 커피숍이나 바에 주목하고, 주민들은 웨스트 지역에 비해 저렴한 집값에 주목한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매일 거쳐가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도시 개발의 떠오르는 노른자 지역. First nation이 제법 남아 있는 땅에 이탈리안이 터를 잡고 중국인이 우수수 쏟아지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콜라주가 탄생되었다. 


- 지금 작은 방 두 개가 비었는데, 저쪽 방은 한 시간 전에 어떤 남자가 보고 갔어요. 레퍼런스 체크하고 별 이상 없으면 그가 이사 올 거예요. 


오래 전, 자신을 Joey라 소개한 남자가 집을 보여주며 말했다. 커머셜 드라이브에서 동쪽으로 1,880보를 걸었을 때 보인 이층짜리 하우스였다. 언제 지었는지 가늠하기 힘들 만큼 낡고 볼품없었지만, 제법 넓은 마당과 실내가 마음에 들었다. 현관문과 이어지는 이층에는 거실과 주방, 화장실, 네 개의 방들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다시 작은 주방과 화장실, 세 개의 방들이 있는 식이었다. 


- 원래 어학원과 연결된 인터내셔널 하우스였죠. 방이 빌 때마다 알아서 학생들을 보내주니까 편하긴 했는데, 워낙 뜨내기들도 많고 파티다 뭐다 난장판을 만들기도 해서...... 이젠 오래 머물 사람들만 찾고 있어요. 


나는 비어있는 작은 방 두 개를 둘러보았다. 한 시간 전의 사내는 붙박이 장이 있는 방을 원한다고 했다. 남은 방은 거실과 주방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이었다. 다이닝 룸을 개조한 것이 틀림없었다.


- 여기는 많이 시끄러울 것 같은데......

- 원한다면 400불에 맞춰줄게요. 450불에 광고를 올리긴 했지만.


Joey가 싱긋 웃으며 세상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방값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 우리 가족은 길 건너 집에 살아요. 아버지께서 매일 둘러보고 관리하시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그는 내가 건넨 레퍼런스 레터를 체크하며 말했다. 


- 내일까지 연락 줄게요. I don't think there would be any problems. You look like a normal person.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normal person의 정의에 대해 생각했다. 주인집 아들이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은 무엇일까. SNS는 지인들의 아기 사진들로 도배되었고 누군가는 승진을, 누군가는 집을 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잘은 몰라도 그 세계에서 나는 보통과는 꽤 먼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Joey가 통장잔고를 묻지 않아 다행이야. 나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 몸을 뒤척였다. 


1,880보. 커머셜 드라이브에서 동쪽으로 1,880보면 우리 집이 보였다. 십 분이 조금 안 되는 거리를 걷는 것이 지겨워 종종 걸음 수를 세곤 했는데, 잰걸음에도 2,000보를 넘은 적이 없었다. 2011년 9월부터 살았으니 햇수로 5년을 지냈다. 들고 나는 이들 가운데 네 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이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우리는 normal people이었다. 


이스트 밴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네온 십자가는 여러 디자인의 모자와 티셔츠에 박혀 판매되었다. 향수병이 몰려올 때면 나는 그 십자가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외국 생활을 하는 이들은 흔히 처음 발 디딘 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고 들었다. Hometwon. 왕갈비와 성곽이 유명한 제1의 고향과 판이하게 다른 이곳이 내겐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 1,880보를 걸어와 낡은 이층 집에서 보이는 불빛과 떠들썩한 소리를 마주할 때면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집이다. 집에 다 왔다. 


- Where have you been? We are about to watch a movie!


나보다 먼저 붙박이 장이 있는 방을 찜했던 남자, Thomas가 어서 앉으라는 듯 소파 한쪽을 두드린다. Emma와 Liam이 팝콘을 준비하는 동안 Logan이 빈백에 앉아 맥주를 홀짝인다. 뒤통수가 뚱뚱한 티브이가 거실 한편에서 환한 빛을 쏟아내고 있다. 그 따뜻하고 눈부신 기운에 나는 앉자마자 스르르 잠에 빠진다. 


언제까지고 반복될 것 같던 그런 날의 풍경. 

2015년 7월, 우리가 함께 살던 마지막 달이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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