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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e is your girlfrend, isn't she?
갈색 머리의 여자가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붙었다. Isn't she, 하며 나를 지목하는 손끝이 불안정하고 눈가의 화장이 번져 있다. 여자는 단단히 취한 모양새다. 분명 내일 아침이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Nah, we are just roommates.
그래? 정말? 그럼 왜 나를 무시하는 건데? 여자의 태도가 공격적으로 바뀌자 Thomas는 아무 대꾸 없이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죄인이 된 기분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 게스 타운의 밤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포도알 같은 가로등들이 환하게 비춘 풍경이 꽤 낭만적이었다. 나도 남자 친구와 이 거리를 걷고 싶다고. 인사불성의 여자에게 말해주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앞에 우리의 탈출구인 워터프런트 역이 보였다.
- 아까는 미안해.
-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닌 걸.
흔들리는 트레인 안에서 Thomas는 거듭 사과를 했다. 우리는 단기로 머물던 룸메이트의 환송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클럽에서부터 그에게 구애공세를 시작한 여자는 역 앞에서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이래서 잘생기면 피곤하다는 건가. 나는 창문에 비친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 뚜렷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으로 그려진 얼굴. 온화한 성품을 품고 있는 잘생김이었다. 바다 건너에서 만난 엄마 친구 아들 같은 느낌이랄까.
- 오늘 밤에 Julie랑 통화하기로 했거든. 많이 힘들어하는 거 같아.
Long distance relationship is tough. 그는 짧게 쓴웃음을 짓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잘생김도, 장거리 연애 경험도 없는 나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잠자코 창밖을 응시했다. EAST VAN. 그 너머로 보이는 네온 표지판이 집에 다다르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같은 날 한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의 방은 내 것과 비슷한 크기에 붙박이 장 하나가 추가로 달려있었다. 내 작은 몸집에도 꽤 비좁은 공간인데 큰 덩치의 그에겐 신기하게 잘 맞았다. 토마. 불어로는 S발음을 내지 않아. 프랑스 파리 출신의 그가 말했다. 나는 철저한 한국인의 습성으로 자기소개 끝에 굳이 나이를 덧붙였다. 그래서 그는 나를 Nuna로 불렀다. 자신의 친누나보다 한참 더 위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면서.
토마는 어린 시절 살았던 미국을 동경했지만 복잡한 비자 문제로 인해 꿩 대신 닭 잡듯 캐나다에 왔다. 할리우드 배우 지망생. 그 꿈을 좇기 위해 미국의 문화와 언어를 잊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가 American이 아닌 French라는 사실을 알면 화들짝 놀랐다. 수많은 미국 영화와 드라마가 밴쿠버에서 촬영되고 있으니, 이유야 어찌 됐든 그의 캐나다행은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곳의 흑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도 그가 오디션을 볼 때 유리하게 작용했다. 갓 에이전시가 생긴 토마는 종종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드라마의 엑스트라로 동원되었다. 이담에 유명해져도 모른 척하지 말아 줘. Yes, nuna. 우리는 'If I become famous......'로 시작하는 말장난을 자주 했다. 그는 배우로 유명해져서 여자 친구와 함께 미국에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일 년이 넘은 장거리 연애. 파리의 여자 친구는 조금씩 지쳐갔다.
- Nuna......
주말 오전, 늦잠을 자고 나와보니 토마가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 거르지 않고 짐에서 운동하는 녀석이 소파에 누워있다니.
- Do you have rice and seaweed?
쌀? 김? 닭가슴살과 달걀이 주식인 그가 웬일로 쌀을 찾는담.
- 응.
- 혹시 라이스 볼 만들어 줄 수 있어? 왜 그거 있잖아, 내가 전에 맛있다고 한 거.
아아, 그거. 그와 함께 몇 번인가 계란밥에 김자반과 스리라차 소스를 넣고 비벼 먹은 사실이 기억났다. 오늘은 근육 만들기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 그까짓 거 후다닥 만들면 되지,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기운 없이 늘어진 토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덥수룩한 수염이야 그렇다 치고, 바짝 밀고 다니던 머리카락도 제법 자라 꼬불거렸다. 참 빨리도 자라지. 이대로라면 한 달도 안돼 아프로 헤어를 한다 해도 믿겠다. 그나저나 무슨 일일까.
- 맵지 않아?
- 아니, 맛있어. 고마워.
- 오늘은 운동 안 해?
- 응, 안 해.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계란밥을 먹었다. 티브이를 봤다가 그를 봤다가, 티브이를 봤다가 그를 봤다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어도 짧은 대답만 돌아왔다. 여느 날의 토마가 아니었다. 나는 말 붙이기를 포기하고 잠자코 있는 쪽을 택했다.
- 나 내일 오디션 봐.
한참을 조용히 있던 그가 말했다.
- 그래? 잘됐네.
- 이번엔 대사도 있다? 두 마디지만.
- 그래? 잘해봐!
- 근데 Julie랑 헤어져서 집중이 안돼.
- 그래......? Are you okay?
참 말주변도 없다.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괜찮냐고 재차 묻는 꼴이라니. 나는 다시 잠자코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Yeah, I will be okay. 토마는 빈 그릇을 한쪽으로 밀고 소파에 기대 누웠다. 앉아있기도 일어나기도 어색해진 나는 엄청난 뉴스라도 보듯 티브이를 주시했다. 불쌍한 녀석. 원한다면 몇 번이고 계란밥을 만들어 주리라.
육 년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일 년간 장거리 연애가 이어졌다. 파리와 밴쿠버의 시차는 아홉 시간. 이곳이 낮이면 그곳은 밤이었고, 이곳이 밤이면 그곳이 낮이었다. 클럽에서 돌아온 날 밤, Julie는 토마에게 말했다. 네가 파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헤어질 거야. 그는 파리로 돌아가는 대신 오디션을 보러 갔다. 대사도 두 마디나 있는 역할을 따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조금씩 괜찮아졌다.
2012년 겨울.
룸메이트들이 전부 거실에 모였다. 티브이에서는 Supernatural이 방영 중이었다. 주인공들의 길고 긴 대사가 끝나고 악당과 그의 부하가 화면에 잡혔다. 토마! 나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주인공이 악당 부하에게 가스를 뿌렸다. 으악! 화면 속 토마가 얼굴을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일, 이초 정도의 짧은 순간. 예정되었던 두 마디 대사가 사라진 대신 그는 첫 단독샷을 거머쥐었다.
나는 티브이 속 토마에서 맞은편에 앉은 현실 속 토마로 시선을 옮겼다.
If you become famous, don't forget about me.
Yes, nuna.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