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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건물을 쉽게 허물지 않는 밴쿠버에는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스타일의 하우스들이 존재한다. 집 앞으로 난 작은 포치와 함께 폭이 좁고 비대칭의 구조를 이룬 Victorian house, 낮은 지붕과 돌출된 처마, 굵은 기둥이 인상적인 Craftsman house, 가파른 지붕선과 곡선을 그리는 창문이 로맨틱한 English storybook house, 낮고 넓은 정면을 가진 Rancher style house, 벽돌로 된 장식과 두 가구가 나누어 쓸 수 있는 구조를 이룬 Vancouver special house까지. 시대에 따라 흐른 유행은 하우스의 나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Commercial Drive를 벗어나 8번가를 따라 걷다 보면 길목에 자리한 작고 낡은 하우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5, 60 년대에 지어져 수많은 베이비 부머들을 탄생시킨 Mid-century builder의 양식이다. 그 낡음의 정도가 깊어 본래의 연식보다 오래된 느낌이 드는 하우스에는 Mr. Wong 가족이 살고 있다. 젊은 시절 마카오를 떠나 캐나다로 터전을 옮긴 Mr. Wong은 이곳에서 다섯 명의 자식들을 키우고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은퇴 자금을 모아 길 건너의 낡은 하우스 하나를 추가로 구입했다. 볼품은 없지만 방은 많으니 셰어하우스로 투자하기에 딱이란 심산이었다. 덕분에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 가족들을 위해 상자처럼 찍어냈던 하우스는 이제 나와 같은 떠돌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 Hi, Mr. Wong.
주방을 정리하던 그가 나의 인사말에 고개를 까딱하며 눈웃음을 짓는다. 지난밤 하우스 파티를 벌였던 집은 폭탄을 맞은 듯 난장판이다. 정작 손님을 불렀던 룸메이트 녀석들은 늦잠 중인데 Mr. Wong은 매일 하는 집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휴지나 세제가 부족하진 않은지, 낡은 세탁기가 또 물을 토해내진 않는지, 재활용 쓰레기가 넘치지는 않는지. 은퇴 후 렌트 수입으로 생활하는 그에게 이곳은 신성한 일터와도 같았다.
- Oh, by the way, my internet is not working.
- ...... eh?
- 인터넷이...... 안...... 된 다고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연신 두 눈을 깜빡이는 Mr. Wong에게 랩탑을 들어 보였다. Not. Working. 안. 된다고요. 그제야 대충 상황 파악이 됐는지 그는 한 손을 공중에 휘휘 저으며 말했다.
- My son coming. Son. Coming.
사십 년 가까운 이민 생활에도 그의 영어 실력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광대한 중국 커뮤니티의 편리함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영어가 완벽한 케네디언 자식들을 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Mr. Wong의 자식들은 그의 중국어를 듣고 영어로 답하곤 했다. 하지만 손자들은 그의 중국어를 들어도 연신 두 눈을 깜빡일 뿐이다. Mr. Wong이 영어를 들을 때처럼.
- 우리 형제들 이름이 뭔지 알아? Kim, Tim, Jack, Anne, 그리고 Joe.
Mr. Wong의 아들은 마지막 이름을 말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발음하기 쉬운 이름으로만 골라서 지은 거지, 최대한 단순하게. 그 날 우리는 동네 스타벅스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일회용 컵에 눈길을 주었다. 재차 내 이름을 묻던 직원은 Kebby라는 이름을 컵에 적어두었다. 작은 물음표 두 개와 함께. Kebby??
- 나도 쉬운 영어 이름을 지었어야 했는데. 내 R 발음을 아무도 못 알아들을 줄 몰랐지 뭐야. Kebby 라니......
- 학교 다닐 때 주변에 Joey라는 이름의 동양 남자애가 셋이나 있었어. 다들 나한테도 Joey라고 부르더라고. 처음엔 Joe라고 고쳐주다가 어느 순간 포기했지.
그래서 이제 내 이름은 Joey. Joey WRONG. 찡긋하는 그의 눈웃음이 Mr. Wong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다른 형제들이 독립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살고 있다. 종종 셰어하우스를 찾아와 아버지 대신 이런저런 잡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Mr. Wong이 손을 휘휘 저으며 눈을 깜빡인 다음 날엔 영락없이 Joey가 나타나는 식이다. Joey는 셰어하우스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서툰 동양인인 나를 살갑게 챙겨주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를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내가 이민 1세대인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또 다른 Mr. Wong이었다.
지금은 천정부지로 오른 땅값을 자랑하는 이스트 밴쿠버도 한때는 저소득층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Joey는 그중 한 커뮤니티 센터에서 일하며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 Mr. Wong이 좋아하던 약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말이다. 가난한 이민자의 자식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내가 잘 알거든. 담담한 그의 말투에 나는 젊은 Mr. Wong과 어린 Joey를 상상해본다. 다섯 명의 아이들로 복작였을 작고 낡은 하우스도.
오후에는 Joey가 인터넷을 체크하기 위해 셰어하우스에 들렸다. 함께 돌아온 Mr. Wong은 모뎀을 확인하는 아들 옆에서 알 수 없는 중국어로 무언가를 한참 설명 중이다. 나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도 오죽 답답했을까.
- Okay, it's working now.
Joey가 랩탑 속 인터넷 화면을 보여주자 Mr. Wong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Working. Yes, working, 하고는 아들의 등을 툭툭 건드려도 본다. 룸메이트들이 Joey와 수다를 떠는 동안 Mr. Wong은 지난밤 파티의 흔적으로 남은 맥주병들을 자루에 담고는 어기적거리며 뒷문으로 사라진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는 그는 빈병들을 가게에 반납하고 동전 몇 개를 건질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셰어하우스에 출근 도장을 찍겠지. 휴지와 세제를 채워 넣고, 세탁기를 점검하고, 재활용을 수거하면서. 룸메이트 중 누군가 말을 걸으면 수줍은 눈웃음을 짓고는 대답할 것이다. My son, coming.
2013년의 봄날.
8번가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낡은 하우스가 조용히 저녁을 맞이한다. 저 건너에는 Mr. Wong이, 그리고 이곳에선 내가 반대편으로 저무는 해를 마주하면서. 이렇게 몇 번의 저녁을 보내고 나면 나도 이방인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사십 년 뒤에도 나는 그대로이지 않을까.
그때도 이 낡은 하우스는 그대로 남아있을까.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