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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Sep 22. 2020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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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옆방의 알람 소리가 목조 건물의 얇은 벽을 타고 흐른다. 잠귀가 밝은 Emma의 알람은 3초 이상 울리는 법이 없지만 그 사이 우리가 사는 집은 덩달아 일어날 채비를 한다. 기름칠이 부족한 방문과 낡은 마룻바닥이 끼이익 신음을 내면 주방의 냉장고가 윙, 하고 울리는 식이다. 화장실의 샤워기가 힘겹게 물을 끌어올리는 동안 지하의 보일러는 들릴락 말락하게 낮고 굵은 베이스 음을 흘린다. 그 미세한 소리들이 한데 섞여 구분이 어려워질 때쯤이면 나도 눈을 뜨고 하루를 준비한다. 새벽 다섯 시 반. 커튼 밖 세상은 아직도 어둠인데 찬 공기를 가르며 저기, Emma가 간다.


- 새 사무실은 어때? 일찍 일어나려면 피곤하지 않아?


거실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Logan이 물었다. 나는 한창 저녁을 먹는 중이던 Emma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내 접시엔 볶음밥이, 그녀의 접시엔 페스토 파스타가 수북이 쌓여있다. It's not bad,라고 말하며 Emma가 포크를 입으로 가져간다. 작은 체구에 갈색 머리, 적당히 오른 볼살이 어우러진 그녀에게선 발랄하고 귀여운 소녀의 느낌이 난다.


- 내 자리에 앉으면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이거든. 경치가 정말 좋아. 일찍 일을 마치는 것도 좋고. 출퇴근 거리가 멀어서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난 지금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Emma가 동조를 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회사의 지원으로 영주권을 준비 중인 그녀의 상황은 케네디언인 Logan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영어가 문제 될 리 없는 그녀가 나보다 취업 시장에서 우위에 있었던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밴쿠버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녀가 원치 않았던 부서 이동에도 묵묵히 새벽 출근길에 오르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Emma는 영국의 시골에서 왔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한참 가야 나온다던 그녀의 고향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동네 사람들은 제법 센 사투리를 쓴다는데 내겐 그저 어렵기만 한 영국인의 발음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묻고, 그녀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런 우리의 대화는 도돌이표가 붙은 악보와도 같아서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I got some pudding for you guys!


저녁을 먹고 난 뒤 Emma가 작은 파이를 가져왔다. 식사를 하고 나면 그녀는 입버릇처럼 푸딩이 먹고 싶다고 했다. 푸딩? 그게 그렇게 좋은가? 나는 계란 맛이 날 것 같은 탱글탱글한 형체를 떠올렸다. 영국인에게 푸딩이란 디저트를 말한다는 것과 Emma의 통통한 볼살은 바로 그 푸딩 덕분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나 깨달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집안엔 우리 셋 밖에 없는지 고요한 기운이 흘렀다. 벽난로의 진짜 나무와 티브이 속 가짜 나무가 동시에 타는 가운데 냉장고가 이따금씩 윙, 하고 울었다. 타닥타닥, 윙. 타닥타닥, 윙. 얼마 전 점등식을 한 크리스마스트리까지 더하니 제법 연말 분위기가 났다.


- 벌써 한 해가 다 가네.

- 이번 연휴에는 집에 못 가서 아쉬워.

- 우리끼리라도 크리스마스 디너는 챙기자. 나 칠면조 잘 구워.


크리스마스는 케이크인데? 나는 한국에서 먹곤 했던 작고 예쁜 연말연시 한정판 케이크를 떠올렸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어? Logan이 신기하다는 듯 묻자 Emma가 외쳤다. 푸딩은 언제나 좋아!


모두가 늦잠을 자는 주말에도 Emma는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삼십 분 정도 트레인을 타고 영국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동네에 가서 이런저런 먹거리를 사 오기 위함이다. 배낭 한 가득 영국식 차와 간식거리를 짊어지고 집에 돌아오면 편안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시작한다.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얌전히 모은 두 손엔 따뜻한 밀크티가 들려 있다. 고향의 부모님, 미국의 첫째 동생, 그리고 호주의 둘째 동생과 통화를 하고 나면 어느새 점심이 훌쩍 지나 있다.


- 크리스마스는 늘 부모님과 함께 했는데......

- 다음 휴가에 방문하면 되지.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 아니었던가? 가만 생각해보면 내겐 가족과 함께 했던 특별한 기억이 없었다. 어린 시절엔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면 주던 종합과자 선물세트가, 머리가 큰 뒤엔 남자 친구나 단짝 친구들과 거닐던 도시의 밤거리가 중요한 이벤트였을 뿐이다. 캐나다에 와서야 불 꺼진 상점들과 조용한 거리를 보며 이곳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 My dad has been sick lately.


작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밀크티를 마시던 Emma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몸이 안 좋으셔.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는 꼭 고향에 가려했는데. 그녀는 오른쪽 검지로 티백의 가느다란 줄을 돌돌 말아 올렸다. 그 틈을 타고 달짝지근한 향이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내가 아는 Emma는 모험가였다. 배낭 하나로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호주와 뉴질랜드, 태국에서 오랜 기간 머물기도 했다. 낯선 문화를 접하면 궁금함에 눈이 반짝였고 새로운 음식은 반드시 먹어봐야 했다. 사람들은 세상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다정한 그녀를 사랑했다. 손 안의 밀크티처럼, 그녀는 따뜻하고 달짝했다.


- 아빠가 괜찮으시길 바래.


Thanks. Emma의 볼에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지며 웃음이 돌았다. 마음처럼 안 되는 언어의 한계는 그래서 더 정확하게 진심을 전하기도 한다. 나는 세상 반대편에서 이제 막 잠자리에 들었을 그녀의 부모님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나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이곳의 삶을 선택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래서 Emma는 주말마다 배낭 가득 영국식 간식거리를 사 오는지도 모른다.


2012년 12월 25일.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이 셰어 하우스로 모여들었다. Logan이 준비한 칠면조는 성공적이었다. 돌돌 감은 베이컨 덕에 겉은 바싹하고 속은 부드러웠다. Liam은 감자 요리를 맡았고 Thomas는 인스턴트 스터핑에 정성을 들였다. 우리는 에그녹을 마시고 코리아타운의 빵집에서 건진 케이크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타닥타닥. 벽난로 속 장작이 작은 불꽃을 피우면서 잠시 정적이 일었다. 불 피우는 소리, 너무 좋지 않아? Emma의 한 마디에 냉장고가 질세라 윙, 하고 답했다. 전기식 벽난로를 장착한 새 집들 사이에서 굴뚝으로 연기를 내뿜고 있을 우리 집. 나는 그 고고하게 늙은 자태가 좋았다. 그때 초대받은 손님 중 누군가가 기타를 잡았고 집안의 미세한 소리들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지나갔다.

따뜻하고 포근하게.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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