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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Oct 19. 2020

생애 최초의 김밥


#_


터벅터벅, 누군가 계단을 오른다. 문을 열고 둔탁한 가방을 떨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주방의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 뒷문으로 이어지는 주방과 얇은 나무 벽 하나만 사이에 둔 내 방은 매 순간 발생하는 소리를 섬세하게 흡수한다. 딸깍, 딸깍, 딸깍. 정확히 세 번. Liam이 집에 온 모양이다.


- 벌써 그 많던 쌀을 다 먹은 거야?


커다란 쌀 포대를 뒤집어 마지막 한 톨까지 털어내는 나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이게 언제 산 건데. 그런 너는 벌써 그 많던 감자를 다 먹은 거야?

- 그게 언제 산 건데.


가방 속 삐죽 보이는 감자를 가리키자 Liam이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Well, Koreans eat rice and Irish eat potatoes! 감자, 당근, 계란, 치킨, 파스타 누들과 베이질 페스토. Liam은 장 봐 온 식료품을 냉장고와 찬장에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작은 종이와 검정 펜을 꺼내 들었다. Grocery list: Onions, Apples, Lettuce, Tomatoes. 그리고는 빨간 펜으로 바꿔 쥐고 다시 무언갈 끄적였다. Eggs: best before Oct. 1. 다음번 장 볼 목록과 오늘 산 계란의 유통기한까지. 정갈한 글씨가 나열된 종이를 자신의 찬장에 붙여 놓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제 방으로 향했다. Liam이 셰어하우스에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전등 스위치는 반드시 세 번 껐다 켰다를 반복한다는 것과 손은 연이어 세 번 씻는다는 것, 모든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메모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말이다. 나는 쌀을 씻으며 그의 메모가 적힌 종이를 관찰했다. 빈틈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종이 위에 붙은 눈동자 모양 자석이 나의 시선을 되받아 응시하고 있었다.


혼돈 속의 질서. 셰어하우스에서 그의 존재를 설명하자면 그랬다. 신호 체계를 알 수 없는 무법천지의 도로에서 꿋꿋이 횡단보도의 녹색불을 기다리며 서 있는 보행자 같은 느낌. 그게 Liam이었다. 1층 구석에 자리한 그의 방은 볼 때마다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모습이었다. 2층 거실 크기와 꼭 맞는 넓은 공간에 구김살 없는 침구가 인상적이었다. 일인용 소파 위에는 하얀 쿠션이, 탁자 위에는 두어 개의 책들이 각도를 잰 듯 늘 정확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완벽한 정리정돈과 깔끔함을 추구하는 그가 어떻게 셰어하우스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그는 다른 이에게 깔끔함을 강요하지 않았다. 철저히 자신만 스스로 정한 룰을 따를 뿐이었다. 그의 방, 그의 찬장, 그의 냉장고 영역. 정신없이 어질러진 집에서도 유독 깔끔한 곳이 있다면 그게 Liam의 공간이었다. 혼돈 속의 질서. 딱 그랬다.

  

- 뭐? 스시를 먹어 본 적이 없다고?

- 응. 쌀을 좋아하지 않아서.


Why? I don't like sticky rice.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Liam이 자신을 변호하듯 말했다. 주말 저녁. 누군가가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은 탓에 주방엔 밀린 설거지들이 가득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룸메이트들이 요리를 하는 대신 스시를 주문하기로 의견을 모은 순간이었다.


- 밴쿠버에 스시 레스토랑이 천지인데 어떻게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 날 생선을 먹는 것도 싫고 밥이랑 같이 먹는 건 더 싫어.

- 그럼 밥은 먹어본 적이 있고?

- 인도 커리라이스는 좋아하는데...... 찰진 밥은 먹어본 적이 없어.


Liam이 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눈치챈 사실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그의 주식은 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치킨과 야채가 들어간 건강하고 조금은 밋밋한 음식이 매 끼니에 등장했다. 변화라고 한다면 당근이 파프리카로 바뀐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찰진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니. 흩날리는 밥 밖에 모르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다.


- Let's try it this time then. 인생의 첫 스시를 먹어보자고!

- No...... I'm okay.


난 정말 괜찮아. 그는 나와 룸메이트들의 권유를 피해 슬쩍 자리를 떴다. 시들해진 우리가 스시를 주문하고 다시 영화를 보는 사이 Liam은 조용히 주방을 치웠다. 음식이 배달되었을 때 그는 젖은 그릇들을 행주로 뽀득뽀득 닦고 있는 중이었다. 싱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반짝였고 프라이팬 위에는 치킨이 익고 있었다. 나는 찬장에 붙은 종이에 주목했다. 눈동자 모양 자석도 이에 지지 않는 시선으로 응수했다. Grocery list: potatoes, chicken.


고요한 일주일이 흘렀다. 셰어하우스의 주방에선 스파게티, 라면, 치킨 샐러드, 그릴드 치즈, 볶음밥 따위의 냄새가 공중을 떠돌다 사라졌다. 누군가는 설거지거리를 가득 만들어내고 누군가는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상도 반복되었다.


- 스시를 그렇게 만드는 거야?


다음날 예정된 하이킹을 위한 먹거리를 만드는데 Liam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건 김밥이야. 이렇게 찰진 밥을 김에 펼치고 여기 재료들을 넣어서 둘둘 마는 거지. 차근차근 설명하며 김밥 한 줄을 눈 앞에서 완성시키자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다.


- 김밥? 만드는 게 재밌어 보이는데?

- 한 번 먹어볼래?

-음...... 아니야. 괜찮아.


아차. 찰진 밥은 싫다고 했지. 나는 대신 김밥 꽁다리를 잘라 입 안에 쏙 넣었다. Liam은 맞은편 의자에 아이처럼 턱을 괴고 앉았다. 그의 시선이 김을 깔고 밥을 얹는 내 손길을 따라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 나 한 번 만들어봐도 돼?

- 그래. 내가 도와줄게.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꼼꼼하게 손을 씻기 시작했다. 비누거품을 잔뜩 낸 뒤 물로 헹구길 한 번, 두 번, 세 번. 타올로 닦은 두 손에 위생장갑을 끼고는 드디어 내 옆에 섰다. 김말이의 양 귀퉁이에 꼭 맞게 김을 얹고 한 평생 먹어본 적 없는 찰진 밥을 펼치는 모습이 흡사 예술품을 다루는 장인의 손길 같았다. 빈틈없이 정확한 사각형을 만들려는 그의 노력과 달리 밥알들은 흉하게 짓이겨졌다. 동시에 바닥에 깔린 김과 그의 이마에도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다.


- 다시 만들어도 돼?


Liam의 표정에서 어쩔 줄 모를 강박이 느껴졌다. 그럼, 나 쌀 많아! 나는 인심 쓰듯 새 김을 건네주고는 옆구리 터진 김밥을 내 몫으로 가져왔다. 다시 해도 돼? 그럼. 다시...... 그럼! 더 이상 망한 김밥을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찼을 때 그의 마음에 쏙 드는 하얀 사각형이 김 위에 완성됐다.


- I love the colours!


단무지와 시금치, 당근을 한데 올린 그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색깔이 참 마음에 들어. 그리곤 조심스럽게 김말이를 돌돌 말아 올렸다. 하나, 둘, 셋. 손의 압력이 너무 거셌던 걸까. 이번에도 옆구리 터진 김밥이었다. 괜찮아. 잘 만들었어. 나는 그를 다독이며 김밥을 썰었다. 동시에 시금치와 당근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삐져나왔다.


- This is my first kimbap.


Liam이 조금 엉성한 김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처음으로 만든 김밥인데 먹는 시도는 해 봐야지.


- 어때?

- 음...... 괜찮아.


위생장갑을 벗은 그가 손을 씻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김밥을 먹지 않는 걸로 봐선 역시 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덕분에 내일 도시락은 든든하겠네. 내가 대충 주방을 정리하자 Liam이 저녁 요리를 시작했다. 역시 반달 모양으로 자른 감자에 오일을 두르는 그의 모습이 김밥을 만들 때보다 자연스럽다.


2014년. 밴쿠버의 늦가을은 어둠이 저녁보다 먼저 찾아온다. 깜깜함에 기대 누우니 사방이 조용하다. 딸깍, 딸깍, 딸깍. 정확히 세 번, 주방의 전등 스위치가 껐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Liam도 제 방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소파 위의 쿠션과 탁자 위의 책들이 흐트러짐 없이 놓여있는 그의 공간으로. 문득 큰 결심 끝에 김밥 한 조각을 베어 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 기왕이면 맛있다고 해 주지.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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