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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Oct 26. 2020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_


- It's the end of an era! 


여자는 잔뜩 호들갑을 떨더니 팔기 위해 가져온 가방과 모자, 장신구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한 시대가 끝난 거라고. 이 집처럼 훌륭한 파티 장소가 없었는데 말이야. 혼잣말을 멈추지 못하는 걸로 봐선 곧 집을 떠나야 할 나보다 더 이 상황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누구였더라. 얼굴은 낯이 익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 이건 아무도 안 가져간다니까!

- 그러니까 공짜로 주자고!

- 공짜라도 그렇지, 우리 말고 이걸 누가 써? 


Logan과 Liam이 뒤통수가 뚱뚱한 티브이를 들고 나오며 실랑이를 벌이자 여자의 호들갑이 잦아들었다. Nobody wants this garbage. Logan은 짜증을 내면서도 'FREE'라고 적힌 종이를 붙이는 꼼꼼함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이 물건을 얻어온 것 역시 그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던 몸집만 큰 티브이가 셰어하우스에서 받은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빈 백에 기대, 닳아빠진 소파에 누워,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티브이를 중심으로 삐뚤삐뚤한 원을 그려가며 모여들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낡은 하우스와 고물 티브이. 천상의 궁합이었다. 어쩌면 Logan도 한순간 애물단지로 전락한 티브이의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누군가 주워갔으면. 우리들의 은밀한 바람 끝에 고물 티브이는 테이블과 함께 나란히 놓였다. 한여름의 햇살과 푸르른 나무. 야드 세일을 하기에 완벽한 날이었다.


- Sorry for the short notice.


두 달 전쯤, Joey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우리 집에 누수 현상이 생겼는데 공사가 커질 것 같아서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할 말을 찾고 있던 그의 뒤로 Mr. Wong이 눈치를 보며 지나갔다. 


- 워낙 낡은 집이라 고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이번 기회에 새 집을 짓기로 했어. 그래서 공사 기간 동안 우리 식구들이 셰어하우스로 이사를 와야 할 것 같아. 

- 그럼 우리 모두 집을 비워줘야 하는 거야?

-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깐 정적이 흘렀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Okay. 미안할 거 없어. 거실에 모여있던 룸메이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별일이 아니었는지, 별일이 아닌 척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집주인이 들어와서 살겠다는데 어쩌겠어.


한참 뒤 입을 연 건 Thomas였다. 여기서 한 평생 살 계획은 아니었잖아, 다들? 아니었지. 나는 속엣말을 하며 찬찬히 룸메이트들을 둘러보았다. 밴쿠버 초년생이었던 우리도 지난 사 년간 많이 변해 있었다. Logan은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Liam과 Emma는 영주권 취득과 함께 이직을, Thomas는 배우로의 입지를 다져가는 중이었다. 그 사이 녀석들은 모두 나와 같은 삼십 대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Mr. Wong의 낡은 하우스가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간 이곳을 떠나 각자의 안락한 공간과 뒤통수가 납작한 벽걸이형 티브이를 갖고 싶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 하지만 그게 당장이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 몰랐다. 변화는 시나브로, 내가 견딜 수 있는 속도로 다가오는 줄만 알았다. 당장 두 달 안에 셰어하우스를 나가야 한다니. 해외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집이라 여겼던 곳, 가족처럼 익숙해진 룸메이트들,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과 단골 식당들, 주말마다 찾아가던 커피숍, 그 창가 자리. 이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아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더 열심히 파티를 해야겠네!


Logan이 씩 웃으며 마시던 맥주 캔을 흔들어 보였다. 그날 밤에 우리는 무슨 영화를 보았던가. Emma가 좋아하는 푸딩을 먹으며 한참 낄낄댔던 게 기억난다. Thomas는 여자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고, 빈 백에 앉아있던 Liam은 몇 번의 하품 끝에 졸음에 빠졌더랬다. 끝도 없이 반복될 것만 같던, 그런 사소한 순간들. 그게 두 달 전이었다.


- How much is this book?


주변을 둘러보던 중년의 여자가 유럽 여행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두 권에 1달러예요,라고 말하자 여자는 얇은 소설책 한 권을 추가로 골랐다. 맞은편에서는 엄마와 함께 온 아이가 파티용품으로 쓰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야드 세일. 이는 Logan이 제안한 우리들의 마지막 파티였다. 각자의 이삿짐을 꾸리고 남은 물건들을 모아 판매하는 자리에는 제법 많은 친구들이 초대되었다. 셰어하우스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거실을 밝히던 플로어 램프는 Emma의 친구에게, 오래된 청소기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넘겨졌다. 야드 세일은 대성공이었다. 


- 거봐, 아무도 안 가져갈 거라고 했지?


Logan이 앞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티브이를 보며 말했다. 


- 요즘 이런 티브이를 누가 쓴다고.

- 우리가 쓰지. 

- 이제 우리도 필요 없잖아.

- 그러게.

- 그러게......


Right..... Thomas가 메아리처럼 같은 말을 맞받아치며 뚱뚱한 티브이를 의자 삼아 걸터앉았다. 내일이 지나면 우리는 셰어하우스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각자 또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듯 다르게 살아가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많은 것들을 그리워하면서. 


2015년, 유독 해가 길었던 7월의 여름날. 

낡은 우리 집과 네 명의 룸메이트들, 그리고 뒤통수가 뚱뚱한 티브이까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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