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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ul 26. 2020

달링이 없어도 달링하버


#_


시드니 시티 중심에서 십 분쯤 걸어 내려가면 이름마저 달콤한 달링하버가 보인다. 달링이 없는 내게도 충분히 낭만적인 곳. 그래서인지 수많은 커플들이 낮이고 밤이고 물가를 점령하고 앉아있는 곳.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 하염없이 물빛과 불빛을 보는 시간이 좋았다. 정확히 몇 번이나 그곳에 죽치고 앉아 있었는진 몰라도, 그 축적된 시간으로 따지면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공간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 오늘도 꽝이야?

- 응.


한편에 던져진 레쥬메를 향해 고갯짓을 하자 정이는 말없이 맥주잔을 건넸다. 타운홀 스테이션을 시작으로 보이는 가게마다 레쥬메를 돌리고 나니 어느새 달링하버였다. Are you guys hiring? 오늘 하루 백 번쯤 던진 말이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씹혔다. 안 되는 영어로 일자리를 구하는 사이 자존심도, 통장의 돈도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 오늘 스테이크 할인이야.


정이가 키친에서 가져온 그릇을 내 앞에 놓았다. 달링하버를 마주하고 앉아 그럴듯한 스테이크를 즐기는 값이 십 불 남짓이라니. 오늘 하루가 꽝만 있는 건 아니네. 술의 힘인지 고기의 힘인지, 기운이 조금 나는 것도 같았다.


- 나 한 시간 뒤에 마치니까 기다려. 집에 같이 가자.


나는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테이크 한 점을 베어 물었다. 정이는 펍의 중앙에 위치한 바로 돌아가 손님들에게 탭 비어를 내어주거나 이런저런 칵테일을 만들었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긴 머리를 한껏 틀어 올린 그녀는 여러 인종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였다. 눈썹을 강조한 화장과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옷차림, 표정과 제스처까지. 정이에게선 나고 자란 곳을 예측하기 힘든 묘함이 배어 있었다.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은 아니지만 자꾸만 눈이 가는 사람. 그게 정이였다.


한 달 전 처음 그녀를 만난 곳도 달링하버였다. 저렴한 방을 구하던 참에 정이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고 덥석 약속을 잡았다. 함께 계약했던 룸메이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혼자서 세 사람 치의 렌트비를 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녀가 일하는 달링하버의 펍을 지나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낮고 통통한 건물에 들어섰을 때 정이의 키는 한참 더 커 보였다.


- 같이 사는 주인이 좀 짜증 나긴 해도 그럭저럭 살 만해요.


그녀의 건조한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든 숨기지 않을 것 같은 솔직함이 느껴졌달까. 정이의 표현대로 집도 그럭저럭 살만해 보였다. 206호라 쓰인 현관문을 열면 거실과 주방이, 구석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두 개의 방과 화장실이 나란히 있는 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건넸고, 일주일 후 정이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 Andre가 글쎄 세탁기 자주 쓴다고 눈치 주는 거 있지? 세상에, 일주일에 한 번이 자주 쓰는 거야?

- 그래서 뭐라 했어?

- 전기세가 얼만지 고지서 보여달라고 했지. 방세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이야. 하여튼 맘에 안 들어.


일을 마친 정이와 스테이크를 해치운 나는 나란히 달링하버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짜증 나는 집주인을 시작으로 수다의 물꼬를 텄다. I don't give a shit. 정이가 입술을 실룩이자 그녀의 눈썹도 아치를 그리며 따라 움직였다. 나는 그녀의 당찬 기세가 부러웠다.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예쓰를 남발하는 말버릇 탓에 곤혹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화의 주제가 집주인에서 영어, 알바, 그리고 여행으로 넘어갈 즈음 정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 미국 번호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정이의 얼굴에 스쳤다. 남친, 아니 전남친의 전화임이 분명했다.


- 먼저 일어날게. 통화하고 와.


그녀가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나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정이는 아마 한참 후에나 집에 도착할 것이다. 그녀가 국제 전화 카드를 사고도 매달 비싼 휴대폰 요금을 내는 이유. 술에 취하면 자꾸만 울어대는 이유. 다 물 건너 살고 있는 그 남자 때문이었다. 정이는 자카르타의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조금 늦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제 힘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넉넉한 용돈을 받을 만큼 여유롭던 집안이 무너진 것도 그즈음이라고 했다. 언니, 대박에서 쪽박 차기가 얼마나 쉬운 줄 알아? 그때도 정이의 입술이 실룩였던 것 같다. 그대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닥치는 대로 일을 구했더랬다. 겨우겨우 학비를 충당하고 생활비를 벌었다. 정이는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불법 캐시 잡이 걸리는 바람에 그대로 미국에서 추방된 상태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남친과 헤어진 것도 그 까닭이었다. 정이는 앞으로 5년 간 미국을 방문할 수 없다. 어쩌면 평생 비자가 거절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이는 술에 취하면 자꾸만 운다. 나는 물을 마주하고 앉은 정이와 그 건너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내게 전활 걸 남친은 없어도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시드니에서의 첫 알바는 일주일 만에 끝났다. 아니, 정식 알바를 시작하기도 전에 트레이닝이 끝나는 날 잘리고 말았다. 스끼야끼 전문점 사장은 휴대폰 너머로 들렸던 목소리와 달리 성미가 깔깔했다. 손님 앞에서 보이던 사람 좋은 인상도 직원들 앞에선 사라졌다. 후한 손님이 남기는 팁은 당연하듯 사장 몫으로 돌아갔다. 트레이닝 마지막 날, 그는 일머리도 없고 영어 실력도 엉망이라는 이유로 나를 잘랐다. 내가 끼친 손해가 막대하므로 약속했던 시급도 줄 수 없다고 했다.


- 그 새끼 미친 거 아니야?


다음 날 이야기를 들은 정이가 길길이 뛰었다.


- 가자, 지금.

- 어딜 가?

- 그 새끼가 떼어먹은 돈 받으러 가야지.


일머리가 없다잖아, 영어를 못한다잖아. 그래서 그런가 보지...... 정이는 주저하는 나를 앞장세워 스끼야끼 가게로 향했다. 영업을 준비 중이던 사장은 우리를 보고도 못 본 척 제 할 일에 열중했다.


- I...... I...... want...... my money.


오는 길 내내 연습했던 대사 중 한 문장을 간신히 뱉어냈다. 사장이 피식 웃었다. 이거 봐, 내가 못준다고 말했지. 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영어도 못하는 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 앞에서 나는 더 작아진 느낌이었다.


- You know this is illegal, right?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정이가 참지 못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 가게 신고해? 응? 이거 불법인 거 몰라? 뭐? 체크를 왜 나중에 써줘? 지금 안 주면 바로 신고하러 갈 거야. 속사포처럼 퍼붓는 정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주인이 카운터에서 백 불 짜리 지폐를 꺼냈다. That's enough. Take it and go.


- 언니, 정확히 얼마 받아야 해? 이거면 충분해?

- 응, 괜찮아...... 가자 그만.


나는 황급히 돈을 집어 들고는 정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게 문을 나설 때 멀리서 사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보였다. 순간 비참함과 창피함이 눈물과 콧물로 새어 나왔다. 언니도 그래, 왜 말을 똑바로 못 해.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할 말은 했어야지! 정이는 집으로 오는 내내 화를 삭이지 못해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정이가 무서워 받아야 할 임금이 사실 삼백 불이었단 말은 채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은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시티의 한국 음식점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여자 둘이서 얼마나 많이 먹고 마셨는지, 그날 받은 백 불에 오십 불을 얹은 값어치나 되었다. 취기가 잔뜩 오른 채 거리를 걸으며 이유도 없이 희희덕거렸다. 어느 정도 지나니 또 달링하버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가에 주저앉았다.


- 언니...... 그 자식 보고 싶다......


방금 전까지 깔깔대던 정이가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울지마아...... 왜 울고 그래, 울지마아...... 그 자식이 보고 싶지 않은 나도 갑자기 펑펑 눈물이 났다. 울고 싶은 이유는 많았지만 정작 왜 울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말이다.


2009년 5월. 시드니는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정이는 자꾸만 울었고, 알바를 잘린 나는 덩달아 울었다. 달링하버에서.





**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Photo by Shabu Anow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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