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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Feb 04. 2019


#_  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다. 올 겨울 처음 내리는 눈. 덕분에 오늘 우리는 걷지 않고 차로 움직인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함께 이 길을 걸었다. 


아주 작은 커피숍 하나를 발견했어.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 

걷는 걸 좋아하는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어느새 긴 언덕을 넘고 보니 Burnaby라고 쓰인 안내판이 보였다. 우리는 이웃 도시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대체 얼마나 가야 하는 거야. 다리 아프다고. 

나는 슬슬 짜증이 났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돼. 


잡았던 나의 손을 놓고 조바심에 저만치 앞서 걷던 그가 길 모퉁이에 멈춰섰다. Handworks coffee studio, closed.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얌전히 자리한 가게의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그의 눈이 실망으로 가득 찼다. 우연히 발견한 작은 공간에서 나를 떠올리고 꼭 함께 오겠다던 로맨틱한 다짐의 결과는 다시 먼 길을 돌아가며 나에게 들을 원망뿐이었다. 나는 창문 너머 닫힌 커튼 사이로 가게 안을 훔쳐봤다. 정말 작고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이었지만 꽤 아늑해 보였다. 


아주 맘에 들어. 꼭 다시 오자. 

우리는 손을 잡고 먼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불쑥 나오는 짜증을 꾹꾹 눌러가면서.


십여 년 전. 한국을 떠나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도 나는 이 길을 종종 걷곤 했다. 왼쪽으로 난 공원을 끼고 걸어가면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었고, 직진하면 오른편으로 자주 들르던 도서관이 있었다. 저렴한 가격의 음식을 파는 작은 레스토랑들도 골목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 내 옆에 같은 박자로 걸어줄 수 있는 그가 있다는 것 말고는.


나는 모든 것이 느렸다. 달리기 주자가 다섯 명이면 오등, 여섯 명이면 육등. 친구들과 무리 지어 걸어갈 때면 늘 혼자 뒤처져 걸었다. 나는 저만치 앞서가던 친구들이 뒤돌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먼저 가. 이따가 보자. 어느새 혼자 뒤에 남겨지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또래의 모두가 결혼할 때 혼자 유학을 떠났다. 다녀오면 뭐 하려고. 언제 다시 자리 잡을래. 나이를 생각해야지. 나의 느림을 이해해 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 그가 있었다. 나보다 훨씬 긴 다리를 갖고도 같은 속도로 걷는 그가. 우리는 남들보다 느린 결혼식을 올렸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다가오는 지금. 그는 스무 살과 같은 고민을 하는 내게 귀를 기울여준다. 우리의 시간은 남들보다 반나절 느리게 흐른다.



#_ 눈은 길을 하얗게 덮어주었다. 주차한 차 맞은편으로 불빛이 반짝인다. Handworks coffee studio, open.


작은 스툴이 대여섯 개. 조그마한 탁자가 두 개. 랩탑을 얹을만한 큰 테이블은 없다. 우리 외에 유일한 손님인 남자가 주인에게 지금 흐르고 있는 음악의 제목을 묻는다. 1930년대 뮤직인데. 우리 할머니가 들으면 딱 좋아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며 남자는 종이에 제목을 옮겨 적는다. 커피숍에서 음악을 듣고 할머니를 떠올리는 남자도 내 옆의 그 못지않게 로맨틱해 보인다. 나는 잠시 할머니 옆에 앉은 남자가 구겨진 종이를 꺼내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왁자지껄한 사람들도, 테이블 위 랩탑도, 휴대폰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이 문득 문 밖의 세상과 다른 시간 위에 놓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구나. 그가 나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느려도 괜찮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속도대로 이 길을 걷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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