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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Feb 24. 2019

애완동물, 반려동물


#_ 


어린 시절 우리 집 현관 옆에는 작은 토끼집이 있었다. 언니는 여자 토끼, 나는 남자 토끼를 키웠는데 늘 언니처럼 여자 토끼가 갖고 싶다고 칭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정작 두 마리 중에 누가 나의 토끼였는지 구분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우리 자매는 토끼 밥주기 당번이 되기 위해 앞다퉈 싸우기도 했다. 조그만 입을 아작아작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토끼의 모습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슬프게도 토끼들은 어느 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는데 어렸던 우리는 다행히도 그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다.


이후로도 언니와 나는 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부모님을 부단히 졸랐지만 번번이 엄마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 엄마의 깔끔한 성격에 집안에서 키우는 동물이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엄마는 작은 어항을 사 왔다. 새끼손톱만한 크기부터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까지. 형형색색의 작은 생명들 앞에서 엄마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의 임무를 주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물고기에게 모이를 줄 것. 뻐끔거리며 모이를 먹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아작거리던 토끼의 귀여운 입모양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뻐끔뻐끔'을 더 보고 싶었던 나는 물고기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모이를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배가 부른 채 물 위에 둥둥 떠있던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살아있는 물고기에게 살점까지 뜯겨버린 적나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물고기가 신기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을 즈음 어항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서 그 존재를 감추었다. 동물을 갖고 싶었던 나는 그 뒤로도 지치지 않고 강아지를 키우자고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엄마는 그럴 때마다 '화초도 잘 키우지 못하는 내가 무슨 수로 강아지를 키워'라고 응수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지지 않고 '강아지는 내가 키울 건데, 뭐!' 하고 말대꾸를 했지만, 사실 나는 강아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랬다. 내가 동물을 키우지 못했던 이유는 엄마의 반대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키우느냐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나는 토끼와 물고기에게 모이만 주었을 뿐이었고 심지어 물고기에게는 그 단순한 임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토끼집과 어항을 청소하고, 필요한 모이를 마련하고, 마냥 귀여웠던 토끼와 물고기가 죽어버렸을 때 더 이상 귀엽지 않은 그들의 죽음을 마무리한 것은 우리가 아닌 엄마였다. 나는 동물의 귀여운 모습만 좋아했을 뿐 그에 따른 책임감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혼자 남겨진 강아지를 위해 약속 이후 서둘러 집을 향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이해하진 못했다. 혼자 좀 있으면 어때서. 입을 씰룩거렸던 나에게 키울 동물이 없었던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_ 


이 강아지 어때? 너무 귀엽지 않아?


신랑이 내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옅은 베이지색의 곱실거리는 털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안 두들, 록시. 지난 십 년 간 묵혀있던 '나도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봉인 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신랑은 친구가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는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록시를 입양할 주인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래? 우리가 키우자! 하고 반색하는 나를 보고 신랑도 덩달아 신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흥분한 우리와 달리 핸드폰 너머의 친구는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희가 3일 정도 록시랑 지내보는 게 어때? 서로 잘 맞는지도 알아볼 겸.

그럼 그럼! 전화를 끊은 우리의 마음은 이미 록시의 새 주인이었다. 3일이 뭐야, 어차피 우리랑 함께 살게 될 걸.


그렇게 록시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친구는 록시의 장난감과 잠자리로 쓸 쿠션, 사료 그릇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었고 록시에 대한 정보가 가득 담긴 편지도 함께 적어 보냈다. 마침 햇살 좋은 일요일이었기에 우리 셋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여유 있는 시간을 만끽했다. 같은 개보다는 사람을 훨씬 좋아한다는 친구의 설명처럼 록시는 처음 보는 우리를 잘도 따랐다. 녀석은 신랑이 paw, 하고 외치면 자신의 앞발을 말없이 그의 손 위에 포개 놓았고 나를 보면 쓰다듬어 달라는 눈빛으로 벌러덩 누워 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순간 녀석은 생각보다 큰 덩치를 흔들며 거실과 주방 곳곳을 탐색했고 지나는 자리마다 그 부드러운 털들을 마구 날리며 흔적을 남겨 주었다. 한 구석에 물과 사료 그릇을 넣고 맞은편에 쿠션으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나니 우리 집 거실은 평소보다 꽤 좁아 보였다. 신랑과 록시, 한 덩치 하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움직이기라도 하면 정신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참 좋았다. 록시는 우리의 가족이 될 테니까.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일어난 록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열린 방문 앞에 서서 우리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에서 깬 나를 보고 반가움에 달려들려는 록시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안돼! 라고 외치고 말았다. 아직 록시의 털 날림에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던 나는 녀석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난밤부터 훈련을 시키던 참이었다. 내 말을 이해한 것인지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왜 안돼? 하고 묻는 것 같은 착한 눈망울로. 나는 미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록시를 안아주었다. 아, 이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도 집안 구석구석 굴러다니는 너의 털 뭉치들이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록시는 덩치만큼 에너지도 많았다. 신랑이 출근 전, 내가 출근 후 록시의 산책을 맡았지만 녀석은 또 나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우리는 결국 한밤 중 졸린 기운을 쫓아내고 녀석과 함께 또다시 산책길에 나섰다.


저기 말이야, 이 산책이 좀 피곤하네...

그렇지... 비 오고 추워지면 좀 힘들겠는데...

신랑과 나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식구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길가의 잔디 냄새를 맡으며 마냥 행복해 보였다.


약속된 3일이 지나고 신랑의 친구가 우리 집을 방문한 날. 집은 록시의 짐과 털로 정신이 없었고 나는 평생 해본 적 없던 강아지 뒤치다꺼리로 정신이 없었다. 록시! 하고 외치는 친구의 한 마디에 녀석은 총알 같은 속도로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쳇, 우리한테 그렇게 졸졸거리고 따라다닐 땐 언제고. 진짜 주인이 나타났다고 돌변하는 녀석이 참 야속했다.

 

그럼 록시는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살게 되는 거야?

아, 그게 말이야...

친구가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록시는 마당 있는 집에서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아. 덩치가 큰 만큼 록시에게 가장 잘 맞은 환경을 찾아주고 싶어.


친구는 고민 끝에 이웃집 부부에게 록시를 입양시키기로 했다고 전했다. 넓고 마당이 있는 집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환경이라면 에너지 많은 녀석에게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면서 나는 마냥 쉽지만은 않았던 지난 3일의 여정을 떠올렸다. 그래. 록시는 우리 집에 비해 덩치가 너무 커. 자주 산책하는 것도 힘들고. 털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빠지는데. 충성심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아무나 보면 좋다고 따라다니고 말이지... 그런데... 그런데 안 좋은 것만 생각할수록 녀석을 보내기 싫은 이 마음은 뭐지.


복잡한 심경의 나와 달리 록시는 쿨하게 떠났다. 충성심 없이 누구나 잘 따른다고 여겼던 녀석이 주인과 돌아갈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걸 보니 그 야속함에 눈물이 찔끔 났다. 겨우 3일이었는데. 갑자기 집이 왕창 커진 느낌이었다. 거실 한 구석에는 여전히 녀석의 털 뭉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록시가 떠나고 몇 주 뒤, 신랑과 나는 어느 동물 입양 단체와 인터뷰를 했다. 이 단체는 주로 한국에서 버려진 개들과 식용으로 사육되던 개들을 구출해 캐나다로 입양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 강아지를 갖고 싶다는 나의 단순한 생각과 달리 그 과정은 꽤나 복잡했다. 우리는 단체에서 요구한 서류를 제출하고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야 최종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단체 측 사람과 우리 사이에 몇 가지 질문과 답이 오가고 우리의 강아지 입양이 현실로 다가올 때쯤 상대방이 우리에게 물었다.


그럼 강아지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최고 8시간 정도요. 우리 둘 다 풀타임으로 일해서요.  

그렇다면 입양은 힘들겠어요. 강아지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얼마나 외로울지 생각해 보세요. 어려운 환경에서 구출된 강아지들에게 다시 힘든 시간을 주는 건 아닌지... 강아지 키우는 것을 다시 고려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것은 내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책임감만 갖고 키우면 되는 줄 알았는데, 동물을 입양하는 것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강아지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얼마나 외로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동물에게 최선의 환경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록시의 주인도 동물 입양 단체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동물을 위한 배려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과 달리 나는 반려동물이 아닌 애완동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닌 오직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동물을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에겐 새 식구를 맞이할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_


집 안에서 키우는 동물은 결사코 반대를 외치던 깔끔쟁이 엄마에게도 이년 전부터 반려묘가 생겼다. 길고양이가 낳은 새끼를 돌보다 못한 손녀딸이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고양이 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집안을 청소하던 엄마는 이제 녀석이 침대 위 한자리를 차지하고 누워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출했다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에도 루피야, 하고 고양이 먼저 찾는 것은 물론이고, 녀석의 밥과 장난감을 제일 먼저 챙기는 것도 엄마의 몫이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쫄보, 다른 식구들의 등장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는 도도녀지만 엄마 곁에서는 고양이 특유의 성향도 잊은 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의 모습도 볼 만하다.


나는 이제 루피 없이 못 살아. 

오랜만에 본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걸 알아챈 녀석이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엄마와 루피.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평생을 함께 할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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