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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May 17. 2019

물이 마음을 달래는 시간

#_ 1990년. 수원. 대중목욕탕


우리 동네 대중목욕탕은 새벽 다섯 시 반에 문을 열었다. 까마득한 밤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네시 반. 엄마는 두 딸을 억지로 깨워 옷을 입혔다. 어기적거리며 이불에서 벗어나는 시간, 목욕바구니를 챙기는 시간, 거기에 세 정거장 거리를 걸어가는 시간까지. 모든 것은 정확하게 계산되었다. 그렇게 세 모녀가 깜깜한 골목길을 지나 목욕탕 입구에 도착하는 시각은 새벽 다섯 시. 엄마는 늘 우리가 목욕탕의 첫손님이기를 원했다. 원하는 위치의 사물함과 목욕탕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온탕에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굳건히 닫혀 있는 목욕탕 입구에 서서 나머지 삼십 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웃풍이 심했던 작은 주택에서 보내는 겨울은 우리 식구 모두에게 꽤 고역이었다. 이른 아침 거실에서는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렸고, 아래층에서 먼저 따뜻한 물을 써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찬물 세수도 감행해야 했다. 엄마는 그래서 늘 일요일 새벽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맑고 따뜻한 물. 그 안에서 일주일간의 노곤함을 풀고, 차가운 입김 대신 따뜻한 수증기가 서려 있는 거울 앞에 앉아 자식들의 묵을 때를 벗겨내는 것은 가히 신성한 행위였다. 


내게 어린 시절의 겨울은 대중목욕탕에서 느끼는 오감으로 점철되었다. 여탕의 문을 여는 순간 훅,하고 들어오던 습한 기운과 특유의 냄새, 그로 인해 무거워진 공기가 만드는 공명의 소리, 몸을 담그면 잘랑잘랑 탕을 넘치고 흐르던 물의 느낌. 그 사이로 앉은뱅이 의자에 잔뜩 비누거품을 내어 닦은 뒤 수건을 깔던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앉아 봐, 등 밀어 줄게. 낡은 녹색 때타월로 언니와 나의 등을 모두 밀고 나면 그제야 엄마의 차례가 왔다. 나는 입구에서 산 새 타월을 손에 끼고 엄마의 등이 새빨게 질 때까지 열심히 밀었다. 몇 주 정도 지나 길이 들고 나면 새 타월은 헌 타월이 되어 자식들 등을 밀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었다. 거 이리 줘 봐. 그래 갖고 쓰나. 내가 밀어줄게. 옆에 앉은 할머니가 타월을 뺏어 엄마의 등밀이를 마무리하고 나면 어느새 여탕 안은 앉을자리가 없을만치 붐비곤 했다. 


먼저 목욕을 마친 언니와 나는 새 옷으로 갈아 입고 탈의실 평상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그 사이 엄마는 아마도 이불 대신 탕 안의 물을 덮고 누워 잠깐 눈을 붙였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따뜻하고 포근한 물 안의 시간. 뒤늦게 나온 엄마가 바나나 우유를 사주면 우리는 나란히 앉아 탈의식 구석에 달린 티브이를 봤다. 살갗이 한꺼풀 벗겨진 듯 개운한 기분으로 빨대를 빨던 순간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새벽 네시 반부터 잠을 설치며 일어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랄까. 일요일 이른 아침. 세 모녀는 개운한 마음으로 목욕탕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한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양쪽 볼을 발갛게 붉히는 한편 꼬불꼬불 말아 올라간 엄마의 머리카락을 뻣뻣하게 얼리고 있었다. 


어린 자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무렵. 집에 가면 언니랑 나는 사이좋게 이불을 덮고 일요 만화영화를 보겠지.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면 늦은 아침상을 차린 엄마가 우릴 깨울 것이다. 계란 프라이나 동그랑땡이 있으면 좋겠는데. 남들이 슬슬 일어나는 시각. 좁은 골목길 위에는 목욕바구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우리의 뒤를 가만히 따라붙었다. 




#_ 2008년. 유후인. 온천


네, 고객님. 양재에서 수원 가시죠? 


콜택시 전화 상담원은 내가 여보세요를 외칠 새도 없이 목적지를 알아차렸다. 매일같이 밤 열두 시가 넘은 시각에 전화를 해대니 내 연락처가 VVIP로 등록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하긴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할증 붙은 택시비를 생각하면 VVIP가 맞지. 그래도 남은 일주일은 늦은 야근 끝에 택시를 탈 일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내일, 나는 휴가를 떠나니까.


야근이 폭우처럼 쏟아지던 9월. 나는 3박 4일의 늦은 여름휴가를 얻었다. 애초의 계획은 홋카이도를 가는 것이었는데 예산이 부족해 이름이 비슷한 후쿠오카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내게는 꼭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여행의 목표가 없었다. 그냥 출근길이 아니기만 하면 됐다. 콜택시 VVIP 타이틀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는 친구들이 합류하기로 한 저녁까지 무작정 후쿠오카의 시내를 돌아다녔다. 언뜻 보는 도시의 풍경은 한국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내가 이곳의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빼고는. 그래서 무직의 백수가 갈 법한 곳, 공원을 택했다. 그 중심에 자리한 호숫가를 걷던 노인들, 무리지어 수다를 떨던 젊은이들, 무선 모형 보트를 운전하던 무리들. 우리는 모두 비밀리에 결성된 '지금 이 순간 일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 모임의 일원이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주변의 풍경을 바라봤다. 잘랑잘랑. 호수가 바람의 장단에 따라 물결을 일었다.  그 끝으로 빛 조각이 반짝이고 제철 만난 해바라기들이 긴 가지를 어쩔 줄 모르며 일렁이고 있었다. 새벽하늘 보고 출근해서 밤하늘 보고 퇴근했으니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릴없이 공원에 앉아 물결에 부서지는 빛 조각을 관찰하고 있다니. 이보다 더 그럴듯한 휴가가 또 있을까 싶었다.


여행에 큰 욕심이 없기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음식과 온천. 두 가지만 충족되면 이번 여행은 더 바랄 게 없다는 그들을 따라 나는 유후인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외곽의 허허벌판에 자리한 어느 전통 여관에 머물렀다. 그럼 어디 온천을 구경해볼까. 주인이 마련해둔 한상 가득한 가정식을 해치우고 나니 그제야 여관에 딸린 작은 온천이 생각났다. 


끼이익.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경첩에서 새어 나온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뻥 뚫린 천장 너머로 펼쳐진 깜깜한 하늘과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 아무도 없는 고요한 온천에서 몸의 감각은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얘들아, 들려? 


담장 가까이에 붙어 남탕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속삭이듯 내뱉은 목소리는 담장을 넘기지 못하고 적막한 여탕 안에서 나지막이 가라앉았다. 


여기 아무도 없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툼한 돌판 아래 고인 물에 발을 담갔다. 앗 뜨거! 생각보다 뜨거운 물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잠시 심호흡, 그리고 다시 발끝부터 천천히 입수. 결국 몸이 뜨거운 열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일본의 어느 시골 마을. 뜨거운 온천의 물과 그 위로 떠도는 안개 같은 수증기. 그다지 높지 않은 돌담과 뻥 뚫린 하늘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속에서 오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혼자다.

멀리서 풀벌레가 우는 사이에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오롯이 혼자인 시간. 더 이상 뜨겁다 여겨지지 않는 물 안에서 내 몸은 긴장감을 잃고 말랑말랑해졌다. 


괜찮다. 

칼출근은 있지만 칼퇴근은 없던 일상. 마감까지 두 줄짜리 문구를 완성하지 못해 밤을 새우던 날들. 지금의 내가 맞는 걸까 싶으면서도 이보다 더 못한 내가 될까 두려워 그냥 지키고 있던 자리. 맞지 않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억지로 붙잡고 있던 대가로 나는 어느새 몸도 바짝, 웃음기도 바짝 마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괜찮다, 지금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도. 

2008년 가을의 어느 날. 조금 부족한 모습이어도 오늘 하루가 행복한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침에 눈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까라는 마음으로 살지는 말아야지. 가슴께에서 잘랑거리는 뜨거운 물이 내 마음을 씻어주고 있었다. 




#_ 2015년. 쿠트니. 핫 스프링


그러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계획이었어. 


99년 산 낡은 코롤라는 열 시간에 가까운 로드트립 끝에 엔진 오일을 토해내며 탈진하고 말았다. 35만 킬로미터. 정비소에서는 앞으로도 몇 년은 거뜬히 탈 수 있을 거라 했지만, 글쎄. 가다 서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대용량의 오일을 쏟아부었지만 코롤라의 엔진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괜찮아. 원래 로드트립은 이런 거야. 새 차 가지고 여행하면서 다 망가뜨리는 것보다 낫잖아? 

지금은 신랑이 된 남자 친구가 한 마디씩 보탤수록 내 신경은 더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한 시간만 더 가면 핫 스프링이 있네. 거기 잠깐 들려서 쉬었다가 숙소로 가자. 

마지막으로 엔진 오일을 채우기 위해 차를 멈추며 그가 말을 걸었다. 특별한 볼거리 없이 곧게 뻗은 도로를 꽤 오래 달린 직후였다. 우리는 서로 민감해진 신경을 건드리며 티격태격하다가 마침내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고, 기대에 차 출발했던 로드트립은 오직 서바이벌 운전 트립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피곤한데 그냥 숙소로 가. 

한번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차. 곁눈질로 본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즐겁게 보내려고 온 여행이잖아. 그냥 좀 마음 편하게 있을 순 없어?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까 문제지, 이 상태로 집까지 돌아는 갈 수 있겠어? 반박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번에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Ainsworth hot springs. 우리는 어쩌다 보니 이곳에 왔다. 연인끼리 혹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불만 많은 두 사람. 산도 나무도, 그 사이를 흐르는 호수도 완벽한데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 


아담하고 예쁘네. 오길 잘했어. 고마워. 그것은 내가 미안하단 말 대신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사과였다. 

우리 저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 그 역시 미안하단 말 대신 내 손을 잡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녹빛과 푸른빛을 머금은 곳. 밴쿠버 인근의 핫 스프링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말발굽처럼 휘어진 동굴 온천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동굴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수증기가 우리의 시야에서 뿌옇게 번져갔다. 


아무 말도 없이 그와 나란히 앉아있던 시간. 은은한 불빛과 잔잔한 물에 잠긴 동굴에서는 모든 것이 멈춘 듯 더디게 흘렀다. 고요한 물의 흐름이 날카로워진 우리 마음의 결을 다듬어준 것일까. 어둠 속에서 조금 편안해진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제 그만 갈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옷을 갈아 입고 온천을 빠져나오자 여전히 기진맥진해 보이는 코롤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우리의 모습을 빼고는.




** 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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