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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Mar 18. 2019

영원한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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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우리 엄마는 동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놀이터에서 나를 만나면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아이도 우리 엄마를 보면 달려와서 아는 척을 할 정도로 말이다. 당시 우리 뒷집에는 나보다 조금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다. 나 말고, 우리 엄마랑 놀려고.


주연이가 우리 집에 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열 살, 주연이 갓 백일을 지났을 때였다. 나는 아직도 처음 주연의 엄마가 갓난아기였던 주연을 안고 우리 집 현관 앞에 서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경계심과 불안함의 중간쯤에서 흔들리던 눈빛. 내가 아줌마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이십 대의 앳된 새댁이었을 그녀를.

 

주연의 엄마는 중학교 교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육아휴직이 제법 길 텐데 어떤 연유였는지 그녀는 겨우 석 달 된 주연을 두고 복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예정되어 있던 아기 돌보미가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꾸었고 주변엔 도움을 받을만한 친척조차 없었다. 그리고 당장 다음 날 주연의 엄마는 출근을 해야 했다.


이쪽 상황이 좀 급하게 되었어. 자기가 애들은 잘 보잖아. 

함께 온 이웃집 아줌마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고 전업 주부였던 엄마는 용돈벌이도 할 겸 주연이를 돌봐주기로 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아기를 맡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을지 열 살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침마다 주연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출근하던 주연의 엄마를 보며 웃지 않는 아줌마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을 뿐.


반면에 주연이는 누구든 보기만 하면 함박웃음을 짓는 아기였다. 동생 보러 집에 가야 해. 나는 학교에서도 종종 주연이를 생각하며 하굣길을 서둘렀다. 친구들에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주연이를 진짜 동생처럼 여겼다. 엄마 역시 주연이를 우리 자매보다 더 애지중지 키웠다. 여름에는 땀띠라도 날까 열심히 베이비파우더를 발라주고 겨울에는 감기라도 걸릴까 온몸을 꽁꽁 싸매 주었다. 그때 두꺼운 옷 사이로 눈만 빼꼼히 보였던 주연이는 영락없는 꼬마 눈사람이었다. 엄마에게는 전문적인 유아교육 지식은 없었지만 바쁜 맞벌이였던 주연이 부모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넘칠 만큼의 사랑이 있었다.


나는 딱 한 번 주연이 엄마의 울음을 본 적이 있다. 일을 마친 그녀가 우리 집에 들러 주연이를 데려가려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집에 가기 싫었던 모양인지, 주연이가 그녀로부터 등을 돌리며 우리 엄마에게 손을 뻗었다.


엄마...  


주연이가 부른 '엄마'가 자신이 아님을 깨달은 주연이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금세 코 끝까지 빨개진 그녀는 황급히 주연이를 안고 우리집을 떠났다. 그 뒤로도 한동안 주연이는 우리 엄마를 '엄마'로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엄마'는 자연스럽게 '아줌마'로 대체되었다.


'엄마' 사건 이후 주연이의 엄마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우리 엄마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얼굴에 웃음도 많아졌다. 주연이가 우리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서 화라도 난 줄 알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친해졌지? 어렸던 나로서는 그것이 그녀의 경계심을 허물고 우리 엄마에게 신뢰감을 쌓게 된 계기였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주연이가 대여섯 살 되었을 무렵. 엄마와 주연이는 무슨 코미디 듀오처럼 난 아줌마밖에 없어~ 난 주연이 밖에 없어~ 하면서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장난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한창 재잘재잘 말이 많았던 주연이는 당시 뉴스 앵커를 따라하는 놀이에 빠져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늘 방송은... 사고 났어요!' 라는 싱거운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그게 무어라고 또 해봐, 또 해봐, 하며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미디 듀오. 살가움이라곤 없는 두 딸들 머리가 다 크는 동안 엄마와 주연이는 어느새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주연이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늦게 돌아오는 고달픈 수험생이 된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늘 주연이를 생각했다. 밤 9시 30분 즈음이면 동네 마실을 가듯 걸어 나가 주연이가 다니던 학원 입구에 서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교복을 입은 주연이가 아줌마! 하고 달려 나와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주연의 집까지 함께 걸어갔다. 비가 오면 혹시라도 우산을 안 가져갔을까 봐, 추우면 감기라도 걸릴까 봐. 우산 하나 외투 하나 더 챙겨서 나가던 엄마의 뒷모습. 오래전 코미디 듀오는 그렇게 매일매일 짧은 데이트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백일 남짓 아기였던 주연이도 올해로 서른 살. 그녀가 험난한 수험생과 취준생의 과정을 거치며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엄마는 일이 바쁜 큰 딸을 대신해 첫 손녀를 기르며 아줌마에서 할머니가 되었다. 


애들 키우다 보니 젊은 시절이 다 가고 할머니가 되었네. 

엄마는 거울을 볼 때마다 유독 많은 눈가의 주름을 당겨본다.

내가 주연이 때문에 일찍 늙었어. 하도 웃느라. 이거 다 너무 웃어서 생긴 주름 아니야... 

거울 속 엄마는 그래도 주름이 싫지만은 않은지 살짝 웃어 보인다.

 

올 어버이날에도 주연이는 어김없이 카네이션을 준비할 것이다. 아줌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라는 멘트와 함께. 몇 만개의 주름이 생겨도, 십 년의 시간이 더 흘러도 주연이에게 우리 엄마는 여전히 '아줌마'로 남아있겠지. 엄마에게 주연이가 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듯이. 영원히 해체 없는 듀오처럼 두 사람에겐 늘 서로가 특별한 존재이다.




** Image by S. Hermann & F. Richt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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