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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an 15. 2019

표현력 부족한 부녀의 대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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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나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이 저 앞에 보였다. 우리는 산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경치와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을 떠올리며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아빠가 한참 뒤처져 있었다. 나는 깊은 숨을 내쉬는 아빠의 등에서 배낭을 벗겨 대신 매었다. 아빠의 배낭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정말 무겁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그날은 하루 종일 어깨가 결렸다. 잘못된 자세로 잠을 잔 까닭이었지만 어쩐지 아빠 대신 맸던 배낭의 무게가 꿈의 경계를 벗어나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서 오늘은 아빠한테 전화해야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젊은 아빠의 출근 시각은 이른 새벽이었다. 아침잠이 없던 어린 시절의 나는 제일 먼저 일어나 마른걸레로 그의 구두를 닦았다. 수고비로 오십 원, 혹은 백 원짜리 동전을 받고 나면 나는 아빠의 볼에 뽀뽀를 하고 다녀오세요 하며 손을 흔들었다. 골목 끝으로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현관문을 닫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가족의 의식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늘어난 나이만큼 아침잠도 늘었다. 아빠의 구두를 닦고 볼에 뽀뽀를 하던 의식은 이미 생각만으로도 낯간지러운 일이 되었다. 중년 아빠의 여전히 이른 새벽 출근길. 설핏 잠이 깬 채 뒹구는 나를 보고 아빠가 말했다. 야, 너는 참 좋겠다. 나도 더 누워있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봐. 버스에서 처음 자리양보를 받은 날. 아빠는 같은 말을 하루 종일 반복했다.

내가 어딜 봐서 할아버지냐. 녀딸이 처음 할아버지라고 부른 날. 아빠는 연신 거울을 보며 주름살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년퇴직.

손녀딸이라고 하면 껌뻑 넘어가면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할아버지'라는 말은 그렇게 몇 번의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아빠를 수식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른 저녁. 핸드폰 화면에 '아빠'라는 글자가 떴다. 아 참, 내가 먼저 전화한다는 것을 그새 깜빡했구나.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난밤 꿈속에서 아빠 혼자 매고 다니던 무거운 배낭을 대신 짊어졌을 때 느꼈던 애틋한 감정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빠.

응, 그래. 혹시 사위 집에 있나? 바꿔 봐. 오, 하이 저스틴. 하우 아 유? 홧츠 업? 하우 이즈 잇 고잉?


아, 그렇지. 영어공부는 아빠의 새해 계획 중 하나였다. 일주일에 두 번 가는 사회복지관 수업에서 배운 인사말을 캐네디언 사위에게 꼭 써보고 싶었단다.


이제 막 인사말을 배웠는데 그걸 외우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 젊어선 안 그랬는데 나이를 먹어서 그러나 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영어 초급반에서 제일 젊다, 야. 허허허.

 

올해 일흔 하나. 아빠는 이제 어디선가 '할아버지'라는 소리만 들려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는 나이가 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제법 재밌기도 한 모양이었다. 수업시간 중 제일 젊은 학생이라는 사실이 그 즐거움을 배로 했음은 물론이고. 하우 아 유? 홧츠 업? 하우 이즈 잇 고잉? 마치 래퍼라도 된 양 수업시간에 배운 영어 문장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아빠 덕분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빠.

왜?

어젯밤에 아빠 꿈을 꿨는데.

야, 좋은 꿈은 얘기하면 안 이뤄진대. 나쁜 꿈은 다 개 꿈이고.  

아빠...

왜?

... 홧츠 업이 뭐야, 홧츠 업이. 왓츠 업이라고 해봐.


표현이 서툰 부녀의 대화는 오래된 빵처럼 건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아빠의 시시콜콜한 사회복지관 수업 이야기도, 나의 뜬금없는 발음 교정도, 모두 서로를 향한 애틋함을 대신한 표현이라는 것을. 그리고 생각해본다. 어쩌면 아빠의 인생 배낭은 꿈속에서처럼 무거운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칠순 잔치 대신 함께 했던 등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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