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Apr 24. 2020

서툶

노련한 엄마가 되고 싶어서


#_


얘 왜 이렇게 시들시들해? 물도 꼬박꼬박 줬는데.

너무 많이 주니까 그렇지. 삼일에 한 번이면 충분한 것 몰랐어?


살릴 수 있을까? 노랗게 변한 잎사귀를 만지며 나도 덩달아 풀이 죽었네. 지난번엔 물 주는 걸 깜빡해서 화초들이 모두 말라버렸는데 말이야.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애정을 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내가 어려서 물고기 키웠던 얘기 했던가?

먹이를 너무 먹어서 배가 터져버렸다는 그 물고기?


고 작은 것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데. 돌아서면 보고 싶고, 돌아서면 보고 싶고. 결국 엄마한테 들켜 혼쭐이 나긴 했지만. 그래, 그 물고기.


아무래도 난 무언갈 돌보는 소질은 없는 모양이야.

괜찮아. 앞으로 화초는 내가 보살필게.


속이 상해 돌아앉은 나 대신 화분 속 흙을 꾹꾹 눌러보던 그가 말했어. It's okay. 그는 인공수정을 앞둔 내 신경이 한창 예민할 거라 여겼겠지. 약을 먹고 난 뒤 생긴 호르몬 변화 때문일까. 작은 물고기 하나, 식물 하나도 키울 줄 모르는 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나더구나. 이게 엄마되기 자격 시험이었으면 난 진즉 떨어졌겠지? 아니, 엄마가 될 사람들은 애초에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서툶.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노련한 사람은 없는 법이지. 투박하고 서툰 행동은 경험을 통해 갈고 닦여진단다. 흔하디 흔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험도 우리의 무의식 속 행동에 미세한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5일 간 약을 먹고 매일 아침 병원에 들려 피검사를 할 때도 그랬어. 커다란 몰 안에서 어느 길을 가로지르면 가장 빨리 병원에 도착하는지, 몇 시까지 볼일을 마쳐야 회사에 지각하지 않는지.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짜임새 있는 내 행동엔 빈틈이 없었어. 창구접수를 하고 정수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면 내 이름이 불렸지. 어제는 왼팔이었으니 오늘은 오른팔을 써야지. 내일 다시 왼팔에 바늘을 찌르지 않아도 되었으면. 빨리 그날이 왔으면.


어저께 화분에 물을 줬는데 내일 또 줘도 될까? 요 며칠 은근히 더웠잖아.

그래. 조금 주는 것도 괜찮겠지.

주말에 운전 연습할래. 아기가 생기면 돌아다닐 일도 많을 텐데 내 실력 형편없는 거 알잖아.

그래. 도와줄게. 같이 연습하자.

그리고 자기 한국어 공부 말인데, 아기가 생기면...


갑자기 어깨너머로 그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어. 오후 열두 시. 막 깎은 잔디 냄새가 바람에 흘렀고, 길 건너 벤치에는 샌드위치를 먹는 여자가 앉아 있었지. 유독 파랬던 하늘 위로 한 점의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던 유월의 어느 날. It will be okay, honey. 긴장한 나머지 두서없는 말을 내뱉는 나를 다독이던 그의 한 마디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싶었단다. 이토록 서툴고 미미한 나란 사람이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엄마, 나는 어떻게 생겨났어? 언젠가 네가 내게 묻는다면 아낌없이 대답해줄 수 있도록 지금 보는 것, 느끼는 것 모두 담아두고 싶었지.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샌드위치를 먹던 여자가 일어나 오피스 빌딩 안으로 사라졌어. 우리도 맞은편에 자리한 병원으로 향했지. 그의 이름이 먼저 불리고 정수기 옆 자리에 앉은 나는 혼자가 되었단다. 오늘의 서툴고 낯선 경험이 반복되지 않기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과정에 갈고 닦여져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는 내가 되지 않기를. 서툴러도 좋으니 엄마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람과 달리 첫 인공수정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 너를 만나는 대신 똑같은 과정이 몇 번 더 반복되었지. 약을 먹고, 피검사를 하고, 시술 날짜를 받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계절도 바뀌었어. 마지막으로 그와 병원을 찾았던 날은 비가 왔단다. 밴쿠버의 길고 긴 우기가 시작된 참이었지. 유월의 청량감 대신 자리한 흙냄새도 좋았어. 비가 싣고 오는 시멘트 길과 흙이 섞인 그 냄새. 이것도 기억해둬야지. 엄마, 나는 어떻게 생겨났어? 언젠가 네가 내게 묻는다면 아낌없이 대답해줄 수 있도록.


인공수정에 임하는 나의 자세가 노련해질 무렵 담당의는 더이상의 시술을 권하지 않았어. 여러 번 시도 끝에도 달라진 건 없단다. 우리 집 화초들은 종종 시들거나 말라버리고 나는 여전히 너를 기다리지. 아직 만나지 못한 너에게 글을 쓰면서. 언젠가엔 나도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돌봄에 서툰 나도 너를 만나면 성장할 수 있을까? 네가 직접 알려주겠니? 참 보고 싶구나.





** Photo by Kate Krivanec on Unsplash

이전 05화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