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Feb 10. 2020

고백

난임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_


월요일 이른 아침의 유치원. 아이들의 등원이 늦어진 덕분에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 조그만 의자, 낮은 테이블, 손바닥만 한 실내화. 이렇게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곳에 있으면 내 키가 불쑥 커버린 것만 같아. 아차, 깜빡하기 전에 Bob에게 먹이를 줘야지. Bob이라니, 정말 귀엽지 않아? 작은 어항 속에 그보다 한참 더 작은 물고기.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고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어. 작은 알갱이 몇 알을 떨궈주고 야무지게 받아먹는 Bob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는 Chloe가 보이네.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는 Chole의 엄마, Ashley도.


내게 엄마는 best friend였어요.


Ashley는 자신의 엄마, 그러니까 Chloe의 할머니를 떠나보낸 뒤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단다. 오랫동안 마음의 준비를 했을 만큼 예견된 죽음이었지만 그 사실이 이별의 무게를 덜어줄 순 없었지. 가족의 죽음을 겪어보지 않은 내가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안타까운 침묵 속에 우리는 주방 놀이에 빠진 Chloe를 바라보고 있었어.


나도 Chloe에게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돼주고 싶어요. 선생님은 아이가 있나요?


Do you have a child?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식어가는 커피잔을 손에 쥐었어. No, not yet. 짧은 대답 끝에 Ashley를 마주한 순간 빨갛게 물들어가는 눈망울을 보았단다. 낮잠 끝에 엄마를 찾으며 울던 Chloe의 두 눈과 어쩜 그리 닮아있던지.


아이가 정말 갖고 싶어요. 사실은... 혹시 이대로 생기지 않을까 봐 두려워요.


무방비 상태로 젖어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내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잠글 수 있겠니. 처음이었단다. 영영 엄마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내 눈도 빨갛게 물들려는 찰나, 고맙게도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 Ashley는 여전히 놀이에 빠져 있는 Chloe를 힘껏 안아주고는 예의 밝은 얼굴로 돌아왔단다. 다른 학부모와 인사를 나누고 교실을 나서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나와 눈을 마주쳤어. You will be okay.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



고백.



그날부터 나는 더 이상 난임을 숨기지 않기로 했단다. 너를 무척 만나고 싶다고,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더라고. 엄마가 되고도 남을 나이의 기혼자에겐 난임 고백을 할 만큼 자연스러운 상황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지. 가까운 지인들부터 직장 동료들까지. 내가 난임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더구나. 저조한 출산율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 어딜 가나 아이들 천국 같은 캐나다에서 나는 꼭 외롭게 떠 있는 섬 같은 기분이었어. 그런데 난임 고백 이후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단다. 예상치 못했던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 것이지. 남미 특유의 밝은 기운을 지닌 친구는 몇 년째 아이를 기다리며 자주 눈물을 훔친다고 말했고, 또 다른 친구는 시험관을 통해 힘들게 두 아이를 얻어노라고 고백했어. 늘 즐거워 보이는 친구가 남몰래 우는 모습도, 엄마라는 자리가 익숙한 친구가 시험관 시술을 하며 겪었을 힘든 시간도, 내겐 상상하기조차 낯선 일이었단다. You will be okay. Ashley의 빨간 눈망울을 보았을 때처럼 나는 빗장이 풀린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 아가야. 세상엔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기다림에 지쳐 자꾸만 떠내려가는 마음을 안고 외로운 섬이 된 사람들. 그러니 어서 오렴.




How exciting!


첫 난임 상담을 받은 지 꼬박 한 해가 지나 우리는 인공수정을 하기로 결정했어. 나의 잦은 병원 방문 때문에 직장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까 싶어 알려준 사실이었는데, 이런 의외의 반응이라니. 마치 결혼 발표라도 들은 듯 같은 반 선생님은 나를 힘껏 껴안아 주었지. Aren't you excited? 원치 않게 겪어야 할 지난한 과정이 아닌 아기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나의 결정을 축하해 준 사람들. 네가 없어도 나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구나.


담당의는 인공수정의 성공률이 5% 내외라고 했지. 나처럼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그조차도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고. 누군가는 한 번의 시도로 임신이 되는 경우가 로또라고도 말했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와 나는 서로에게 다짐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지. 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단다. 그도 나처럼 마음속에 로또 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내게도 난임 고백 말고 임신 고백을 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 Photo by Kate Krivanec on Unsplash

이전 04화 첫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