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위로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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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진심이었다. 나는 꽤 지쳤고 그럼에도 매달 갖는 희망은 다시 같은 무게의 우울감으로 돌아왔기에. 장난스레 한 손을 올리고 선언문을 낭독하듯 그의 앞에 섰지.
나는 오늘, 엄마가 되는 꿈을 포기합니다.
싸움 끝에 억울함이 묻은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질세라 펑펑 눈물을 쏟았어. 그게 만나지 못한 너로 인해 울었던 마지막 날이었단다. 본 적도 없는 너와 이별하는 기분. 지지부진한 연애를 끝내는 것처럼 슬프면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이 어쩐지 죄스런 마음이었지. 마치 내가 편안해지려고 너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말이야.
그날 이후 내 마음의 행적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처음 얼마간은 마냥 분주했지. 끝내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멈추려면 뭐라도 해야 했고, 그래서 내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도 길었어. 한여름 엿가락같이 늘어진 그 시간들 속의 나는 찬장에 눌어붙은 기름때를 닦아내고 이사 후 건드려 본 적 없는 커튼을 빨았단다. 샐러드 키트를 사는 대신 상추와 케일을 직접 자르고 석류 한 알 한 알을 까는 것에 품을 들이기도 했는데, 몇 백 알쯤 손에 넣다 보면 마음에 잡힌 주름이 몇 갠지 따윈 잊게 되는 거야. 퇴근 후 늦은 시각에 학교 과제를 시작할 때면 피곤함보다 안도감이 몰려오기도 했다. 휴, 이걸 끝내고 나면 이번 주도 지나가겠네. 그렇게 어영부영, 자꾸만 멈추려는 시간을 흘려보냈지.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약이라니까.
다음으로 내 마음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생겨서 아기는 왜 못 갖는대. 내 몸 보이지 않는 어딘가가 엉망진창인 기분. 친구들은 다들 엄마가 되는데 왜 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도 못하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임이 종종 생긴다지만 하필이면 그게 왜 나인지. 왜, 왜, 왜. 서른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며 주변인들의 세상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았고, 엄마가 되지 못한 나는 그 중심축을 잃고 궤도를 이탈하는 행성이 된 기분이었어.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었다면. 지금의 시간을 행복으로 여길 수 있다면. 하지만 내 마음은 그럴 수 없었어. 비자발적 딩크. 그건 내게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다. 숨통을 조이듯 꽉 끼는 옷을 입고 종종 가파른 숨을 뱉으며 생각했지. 왜 나는 행복한 딩크가 될 수 없지. 내가 너무 미웠다. 작은 옷이 아니라 다이어트에 실패한 내가 미운 것처럼.
미움의 시간이 사라질 즈음부터 내 마음은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우리가 아이를 갖지 않아야 할 이유는 생각보다 많았고 그래서 나는 다시 슬퍼지곤 했지. 거시적으로는 기후 변화라든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든가 인류 멸망이 머지않았다 해도 충분할 만큼 엉망인 지구의 상태가, 미시적으로는 밴쿠버의 비싼 물가에 견주기 부끄러울 만큼 소박한 우리의 재정 상태가 그 주된 이유였어. 네가 없다면, 유치원의 긴 대기줄과 비싼 원비에 발을 동동 굴리지 않아도 되고, 일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들에 미안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가 없다면, 한여름 땡볕의 놀이터를 갈 필요도 없고, 너와 함께 타려고 억지로 자전거를 배울 일도 없겠지. 네가 없다면, 빚을 늘리고 늘려도 감당할 수 없는 마당이 딸린 집에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고, 한 없이 주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속상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할 새로운 시도나 현실을 슬그머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네가 없다면. 그리고 생각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핑계.
이건 다 핑계다.
내 마음은 어린아이 같아서 너를 쉽게 놓아버리질 못하네. 생떼를 쓰고 징징거리며 이렇게 너와 느린 이별을 한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그때까지 나는 쓸데없이 분주했다가, 나를 미워했다가, 결국에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반복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은 만나지 못한 너와 헤어지기 위한 핑계란 걸 알기에.
그래서 나는
오늘도 너와 못난 이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