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만들어 주고 싶은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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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에서 '미래의 나의 집'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 그때 내가 생각한 집은 알파벳 Z를 본뜬 구조였는데, 말도 안 되는 그림이라며 친구들이 놀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 일층엔 나와 신랑이, 삼층엔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층의 삐딱한 경사면은 워터슬라이드로 만든다는 엄청난 계획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내가 꿈꿨던 가족은 신랑, 아들 셋에 딸 둘, 강아지와 고양이가 각각 한 마리씩. 아니, 아들 둘에 딸 셋이었던가? 그게 뭐라고 그렇게 고민했을까. 어차피 원하는 대로 이뤄질 것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형제 많은 친구들이 늘 부러웠어. 하나뿐인 언니와도 매일 치고받고 싸우면서 언니, 오빠, 동생 줄줄이 있는 친구한테는 왜 그리 샘이 났는지. 시끌벅적과 옹기종기의 사이쯤 되는 집안 분위기를 동경한 어린 마음이 말했어. 난 이담에 아들 셋, 딸 둘을 낳을 거야. 아니, 아들 둘에 딸 셋을 낳을까? 너를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땐 알지 못했다. 영영 만나지 못한다는 건 상상한 적도 없었지. 스물에서 서른, 그리고 마흔이 가까워지면서 '아들 셋에 딸 둘'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란 현실적인 계획으로 바뀌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계획조차 수포로 돌아갔으니,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희망.
너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둥지.
고백하자면 내겐 몇 가지 꿍꿍이가 있었어. 비록 엄마가 되는 꿈은 포기했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생명을 우리가 품어줄 순 없을까.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그와 내가 만나 사랑을 하듯 우리와는 또 다른 너를 만나 사랑에 빠질 순 없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의 기차가 끝을 보일 무렵 내 머릿속 차단기가 오르고 녹색 신호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니 신중하게 생각해보세요.
해외 입양 상담사는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를 정확하게 짚어주었어. 입양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쉽고 간단한 경우는 없단다. 아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하지. 그럼에도 가끔씩 들려오는 아동 학대 뉴스를 떠올리면 제아무리 단단한 제도도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곤 해.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BC주 내 입양은 생각보다 기회가 많지 않아 오랜 시간 애태우는 예비 부모들이 많단다. 주로 한국이나 중국, 혹은 아프리카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도 최소 2-3년은 기다려야 하지. 입양 절차에 관한 비용은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적게는 이만 불부터 많게는 육만 불까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 필요하단 것도 상담을 통해 배웠어. 아이가 잘 지낼만한 환경인지 알기 위한 가족 인터뷰와 홈스터디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절차야. 예비 부모의 건강 상태도 무척 중요한데 한국 아이를 입양할 경우 나이 제한이라든지 우울증 경력 또한 체크해야 할 부분이지.
기본적인 상담 끝에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지 끝이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곱씹고 곱씹을수록 희망과 불안이 우리 안에서 꼭 같은 무게로 차오름을 느꼈어. 너의 미래를 보호해 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단단한 사람일까.
어쩌면 우리는 자격이 없는지도 몰라.
무슨 자격.
부모가 될 자격.
생각해봐. 우리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을 줄 수 있을지. 입양 절차에 큰 목돈을 쓰고 몇 년을 기다려 아이를 만나는 것. 그건 시작일 뿐이라고. 그는 내가 애써 피하던 현실을 가리켰어. 아이가 가질 수 있을지 모를 더 좋은 가족과 환경을, 그 기회를 우리가 앗아가는 건 아닐까? 부모가 될 능력. 애초에 문제는 그것인지도 모르지. 적지 않은 나이와 경제적인 여유의 부재. 둘이서 적당히 살 수 있는 삶이 셋이 되었을 때 얼마나 빠듯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몇 년을 기다려 너를 만나겠다는 생각은 그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란 걸. 임신을 준비하던 신혼 부부에서 난임 부부, 그리고 비자발적 딩크 부부가 되기까지. 현실은 가늘고 느리게 내리는 비와 같아서 나는 바보처럼 온몸이 흠뻑 젖은 뒤에야 깨달았다. 어쩌면 너를 만나지 못한 건, 아니 너를 만나지 않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르지.
입양 기관에 다시 전화할 필요는 없었어. 기본 상담 후 연락이 없단 건 신중한 생각 끝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의미하니까. 대신 우리는 매일 네가 없이 적당한 '우리의 삶'을 누렸다. 적은 월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출금을 갚고 공과금을 내며 빚의 무게를 줄여가는 것. 어느 마트의 장바구니가 더 저렴한지를 고민하고 어쩌다 한 번씩 조금 더 값이 나가는 음식을 먹는 것. 너와 바꿔 누릴 수 있는 우리 삶의 평균 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날씨가 좋으면 둘이서 손을 잡고 동네를 걸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지. 최소 밀리언이라던 동네 하우스들이 이젠 투 밀리언이래.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하우스 마당에는 조그만 미끄럼틀과 세발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그래. 너를 만나지 않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지도.
몇 달이 흘렀다. 다시 겨울이었고 코비드가 만든 낯선 환경도 뉴 노말이라는 익숙함으로 자리 잡는 중이었지. 여느 날처럼 퇴근 후 저녁을 먹는데 휴대폰 창으로 메시지가 깜빡였다.
혹시 '소라' 품어줄 수 있으세요?
소라.
가슴이 뛰었다.
** Photo by Kate Krivanec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