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조용히 너도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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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I와 IVF,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자세한 검사를 한 뒤에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보죠.
난임 클리닉 fertility centre 전문의와 첫 상담을 받았어. 익숙지 않은 의학 용어들에 난감해하는 나를 위해 의사는 모형을 들고 자세한 설명에 들어갔지. 그제야 나는 IUI는 인공수정, IVF는 시험관을 말한다는 걸 깨달았단다. 의사가 우리에게 어떤 검사를 받아야 할지, 이후 결과에 따라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차례로 짚어주는 동안 나는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단다. 긴장하지 말자. 너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마중 나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마주 잡은 손가락이 내 손등 위에서 뱅뱅 동그라미를 그리는 순간 그 역시 긴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의사가 알려준 몇 가지 테스트 이후 다시 상담을 받기로 하고 우리는 거리로 나왔어. 햇빛이 쏟아지는 아주 예쁜 날이었단다. 아이를 태운 트레일러가 연결된 자전거를 끄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지. 저들 중 누군가도 우리와 같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을까? 지금을 겪고 나면 우리도 저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밴쿠버의 여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야.
여름이 지나기 전에 큰 진전을 기대했던 나와 달리 검사를 받기 위한 과정은 지난하게 흘러갔단다. 평소 좋게만 보이던 캐나다의 여유로움이 병원 검진을 예약할 땐 어찌나 야속하게 느껴지던지. 난임 검사를 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인 까닭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처지인 까닭인지, 나는 그해 가을이 되어서야 첫 검사를 받을 수 있었어. 어쩌면 이것이 의료비가 지원되는 복지의 이면인지도 모르겠다. 금전적인 부담을 지고서라도 사립 병원을 이용했더라면 좀 더 쉽게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도 종종 그 생각을 한단다. 돈과 너의 가치를 저울질한 것 같은 미안함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지.
Hysterosalpingogram. HSG라고 불리는 나팔관 조영술을 통해 나의 나팔관 한쪽이 막혀있다는 진단을 받았어. 그리고 겨울이 다 되어서야 Tubal cannulation, 막힌 나팔관을 뚫는 시술을 하기 위해 대학병원을 찾았지. 회사를 조퇴하고 예약 시간에 맞춰 도착한 대기실. 그곳에서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네 시간을 기다렸단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도 모두 검사를 마쳤고 창 밖으론 이른 어둠이 찾아오는데, 내 이름은 도통 부르질 않는 거야. 이대로 헛걸음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질 때쯤 간호사가 나를 찾았어.
담당의에게 응급환자가 생겨서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아요. 다음에 오셔야겠네요.
그럼 예약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하나요? 오늘 오기까지 두 달이나 걸렸는데요?
미안해요. 검사 예약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서...... 전화해서 예약 날짜를 잡으세요.
다시 처음부터라니.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 수십 번의 전화 끝에 간신히 잡은 예약 날짜였는데. 품이 내 몸의 두배쯤 되는 엉성한 진찰복을 입고 약까지 먹은 채 대기하고 있던 내 모습이 우스워서 그랬는지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그라도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걸. 혼자도 괜찮다고 씩씩하게 왔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감정이라니.
저기...... 그럼 내일 점심시간은 어때요? 내가 담당의와 스케줄을 조정해 볼게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 걸까. 지긋한 나이의 간호사가 자신의 점심시간까지 미루며 내 검사 날짜를 다음날로 바꿔주었어. 서러움과 고마움이 섞여 나는 더 펑펑 울고 말았네.
그리고 내일은 혼자 오지 말아요. 진정제를 먹을 테니 많이 어지러울 거예요.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며 난임 시술의 절차들이 어떻게 되는지 찾고 또 찾아봤어. 산부인과와 관련한 낯선 용어들을 주워 담고 한국에서는 어떤 식인지도 비교해가면서. 난임 클리닉을 처음 방문했던 날과 달리 조금씩 우리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HSG며 tubal cannulation이며, IUI는 무엇이고 IVF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 모르고 살아도 엄마가 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어. 그래도 우리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아는 것이 많아지면 너를 마중가는 길도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을까? 이 언덕만 넘어가면 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첫눈.
다음 날 아침엔 첫눈이 내렸단다. 너무 작아서 땅까지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유약한 눈.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의 길을 따라 병원으로 향했어. 첫눈이 내리는 것 치고 날씨가 참 포근했지. 이러다 오후엔 비가 내리고 말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함박눈은 매서운 추위와 함께 오지. 따뜻한 날씨에 펑펑 쏟아지는 눈으로 덮인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할 순 없는 법이야.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원치 않는 무언가를 견딜 각오도 해야 하겠지?
다행히도 전날과 같은 응급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어. 예정된 시간에, 그러니까 친절한 간호사의 점심시간에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웠단다. 진정제가 투여되니 기분이 몽롱해지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나더구나. 회복 의자에 앉아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가 시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어. 막혀 있던 나팔관이 잘 뚫렸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그리고 지금 보호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왜 이렇게 툭하면 울기만 하는 것인지. 너를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아이가 돼버리면 어쩌지?
괜찮아.
응. 괜찮아.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섰어. 어느새 굵고 탐스러워진 눈이 길이며 나무며, 모든 것을 하얗게 덮고 있었지. 올 겨울의 첫눈. 다 괜찮다고 생각했단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지금 내리는 눈처럼, 그렇게 조용히 너도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괜찮아졌단다.
** Photo by Kate Krivanec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