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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Nov 25. 2019

게으름

그래서 조금 늦는 것이라면

#_


몇 시쯤 되었을까. 한없이 쏟아지는 잠을 껴안고 침대를 뒹굴었더니 주말의 반나절이 지났네. 밤잠이 많은 대신 새벽녘에도 거뜬하게 일어나던 나인데 요즘은 알람도 겨우 듣고 눈을 뜨지 뭐야. 그래서 오늘은 한껏 게을러지기로 작정했지. 창 밖엔 해가 반짝 떠있고 방문 틈으론 그가 만든 팬케익 냄새가 솔솔...... 그런데 순간 엄마가 만든 말간 동치미 국물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너 혹시 좋은 소식 있는 거 아니니?


수화기 너머 엄마가 반색을 하며 물었어. 아기는 때가 되면 생기는 거라더니 엄마도 실은 그때가 언제 오려나 노심초사했던 모양이야.


사실 이번에 생리가 좀 늦긴 하는데......

그래? 안 그래도 느이 아빠가 태몽 비슷한 꿈을 꿨다고 하질 않나 해서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어.


태몽. 아빠는 꿈에서 딸기를 따고는 예쁜 걸 골라 나에게 주려고 모아두었대. 그게 태몽이 아니면 뭐겠어? 하고 묻는 엄마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더라. 우리 엄마 아빠도 손주가 꽤 보고 싶은가 보다 하고. 전화를 끊고는 그와 나란히 앉아 팬케익도 먹고 커피도 한잔 마셨지. 만약 임신이라면 당분간 커피는 못 마시겠지? 대신 맛있는 한국 음식을 잔뜩 사 먹을 테다. 마지막일지 모른다 여기니 손 안의 커피 한잔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조금씩 조금씩 아껴 마셨단다. 세상에, 마음은 이미 제대로 임신부였지 뭐야.


차라리 누워서 자지 그래?


볕이 좋은 오후의 거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어. Take a nap! 분명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든거지? 역시 모든 게 임신 초기 증상인 걸까......? 아기를 가지면 시도 때도 없이 졸리다던데. 유독 한국 음식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요즘 화장실도 자주 가는 것 같아. 별것 아닌 것들도 하나둘씩 끼워 맞추다 보니 그렇게 기다리던 네가 이번엔 정말 날 찾아온 느낌이지 뭐야.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가 다시 넣어두고는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어. 내일. 내일 확인해보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역시나 가 되기 전에 이 기분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


게으름.


어쩌면 나란 사람을 수식하기에 가장 적당한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느린 행동에 몸을 움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주말이면 집에서 뒹구는 게 최고이고 무언가 실천하기까지 한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기본이지. 서른 넘어 유학을 떠나 친구들이 학부모가 될 때 결혼을 했으니 너와의 만남이 늦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테고. 너도 나를 닮아 게으른 건 아닐까. 느린 걸음 때문에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이 더 오래 걸릴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단다. 


아이가 생기면 제일 먼저 dodgeball을 가르쳐줄 거야. 

나 닮아서 운동신경이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활동적으로 키워야지. 너처럼 게으르지 않게. 


우리는 배를 깔고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지. 오랜 시간 동안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 너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의 불문율 같았는데, 정말 오랜만에 '아이가 생기면'이라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단다. 


지난주 대결한 상대팀에는 아빠와 아들이 있었어. 오십 대쯤 되었을까? 볼을 던지는데 건장한 아들한테 뒤지지 않더라니까. 두 사람이 나란히 날 마주 보고 섰는데 꼭 데칼코마니 같더라고. Isn't it cool? 나도 아이가 생기면 그런 아빠가 되고 싶어. 


그랬구나.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아빠가 되고 싶은 그의 마음까지 헤아리질 못했네.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만 보아도 눈이 시리던 나만큼 그에게도 가슴을 찌르는 헛헛한 순간들이 제법 있었을 텐데. 


그래, 그땐 내가 꼭 응원 갈게. 플래카드도 만들어서. Team Raykwon!


그의 넓은 등을 쓸어주면서 말했지. Team Raykwon. 그러니까 이제 그만 게으름 피우고 어서 오렴. 우리가 기다리고 있단다. 




다음날 아침. 한 달에 한번 정확하게 찾아오던 손님은 여전히 무소식이고 나는 임신테스트기를 꺼내 들었어. 이번엔 틀림없는데, 정말 틀림없는데. 초조한 기다림 끝에 선명한 한 줄이 뜨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몇 분을 기다렸단다. 희미하게라도 두줄이 보이면 좋으련만 정말 단호하게 한 줄에서 그칠 줄이야. 미리부터 잔뜩 김칫국을 마신 내가 얼마나 우습던지. 그토록 졸음이 쏟아졌던 건 그저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란 말이지. 눈 앞의 모든 것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아스러지네. 


출근길에 커피를 마시고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는다. 퇴근 전에 치과도 예약하고 내일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염색해야지. 게으르게 미뤄뒀던 모든 일들을 바쁘게 처리하는 오늘이 월요일이라 다행이다. 집에서 뒹굴면서 도무지 소식 없는 네 생각만 하지 않아도 되니까. 카페인도 염색약도 네가 없는 내 몸엔 그리 해롭지 않으니까. 한국 음식쯤이야 좀 못 먹으면 어때. 바쁘게 바쁘게. 이번에도 만나지 못한 너를 떨쳐 내려고 애를 쓸수록 나는 조금씩 바지런해지는구나. 그리고 그날 저녁. 생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괜찮단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기대와 실망을 반복할 것을 알기에, 그러면서 조금씩 더 단단해질 것을 알기에. 그러니까 조금 늦는 것이라면 괜찮아. 맘껏 게으름을 피우고 적당한 때가 되면 오렴. 우리가 기다리고 있단다. 




** Photo by Kate Krivane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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