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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Sep 15. 2019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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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어? 정말 오랜만이야!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다 우연히 A를 만났어. 나를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에 돌아보니 배가 제법 부른 그녀가 서 있더라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그렇게 오래되었던가. 그때 그녀는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아들을 쫓아다니느라 살이 훌쩍 빠졌었는데. 


벌써 7개월이야. 둘째는 내년쯤에나 가지려고 했는데... 모든 게 계획처럼 되지는 않더라고.


햇살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A가 참 예쁘더라.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을 하느라 고생했다던데 어쩜 그렇게 고울 수가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이 신경 쓰여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줄 알았다면 립스틱이라도 발랐을 텐데 말이야.


축하해! 진짜 잘됐다!


나는 뱃속 아이와 A의 건강을, 그리고 그녀 가족의 행복을 바랐어. 아기 낳기 전에 한 번 더 보자는 대화 끝에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지. 집으로 가는 길. 버스에 앉아 생각 없이 바라본 창문엔 무표정의 기운 없는 여자가 나를 마주하고 있더라. 역시 립스틱이라도 발랐어야 해. 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 애써 화장기 없는 얼굴 탓을 해보지만 마음이 갑작스레 가라앉은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지.


샘.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의 샘도 자꾸 늘어나. 누군가에겐 계획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아이인데 왜 우리는 이토록 힘든 것일까. 주변 사람들의 임신과 출산의 소식은 끊이질 않는데 왜 내 차례는 오지 않는 것일까. 새 생명을 품은 신성함이 어떤 것인지, 그토록 힘들다는 출산의 고통은 무슨 느낌인지. 부모가 되어야만 안다는, 그래서 어쩌면 우리 부부는 영영 배울 수 없을지 모르는 그 가르침은 대체 무엇인지.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샘나서 돌덩어리를 품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어.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한편, 부러움과 질투라는 감정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나. 두 개의 자아가 부딪히는 날이면 속이 시끄러워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드는 날이 되기도 하지. 너를 기다리며 기대와 좌절을 반복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나는 점점 더 마음이 못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워진단다. 


나는 네가 샘이 나. 엄마가 된 네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래서 막 샘이 난다구. 사람들이 마음을 편히 가져야 아기가 생긴다는 말하는 것도 듣기 싫어. 마음 불편할 만큼 간절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가 있어?


지인의 베이비샤워를 다녀온 날. 아이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혀서 나는 집에 돌아와 펑펑 울고 말았어. 못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고 Y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드러냈더랬지.


그럼 아기를 갖지 못하면 평생 어른이 될 수 없는 거야? 어른이 되는데 그런 자격 요건이 어딨어! 늙기만 했지 어른도 못 되는 사람이라니. 그건 너무 하잖아!


착한 Y는 남들에게 들킬세라 꾹 눌러왔던 나의 미운 마음을 묵묵히 받아주었어. 밴쿠버에서 한국까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향한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슬픔이라는 감정들은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지구 반대편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Y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지. 


아이가 있는 삶도, 없는 삶도 각자의 가치가 있는 거지. 나도 아이 없는 사람들이 샘날 때가 있어. 혼자 커피숍에서 달달한 커피 한 잔 여유롭게 마시고 싶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 딱 한 시간만. 더도 덜도 안 바라고 딱 한 시간만 오롯이 나에게 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 나도 네가 샘이 나. 하지만 준이와 함께하는 삶이 더 좋은 것도 사실이야. 내게는 아이 때문에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거든. 어떤 삶이 되었든 그 가치는 주인공이 결정하기 나름이지. 


Y의 목소리는 언제나 침착해서 애처럼 생떼를 쓰고 있는 나의 목소리를 마주할 때도 변함이 없어. 해변가의 모래를 밟을 때 느껴지는 사각거림이 낮게 깔려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너도 참 좋아할 거야. 


많이 힘들었어? 너는 주저 없이 아이가 있는 삶을 택할 테니까, 그래서 더 힘들었겠지. 샘이 좀 나면 어때.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걸 가진 사람들이 부러운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세상에 샘 없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 


그러면 안될 거 같아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처지와 비교하는 순간 축하한다는 말은 진심이 아닌 게 될까 봐. 누군가가 스치듯 말하는 사소한 한 마디에도 상처 받고 있는 내가 참 미워서. 그래서 부럽다, 샘이 난다고 말할 수 없었노라고 얘기하고 싶었지.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어. 나는 멈추지 않는 울음을 참느라, Y는 그 울음 끝을 기다리느라 가만히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지. 


고마워, 쉽지 않은 말을 내게 해주어서. 


이제라도 말하길 잘했다. 샘이 난다고, 참 부럽다고 말하길 정말 잘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슬픔의 절반이 가라앉는 기분이었어. 부드럽게 나를 달래는 Y와 떼를 쓰고서야 기분이 풀리는 나를 보니 '아이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게 영 틀린 말도 아닌가 봐. 너를 만나게 되면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때도 이렇게 철이 없으면 어쩌지?


이제 나는 내가 가진 '샘'이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야. 세상의 모든 아가들에게 부럽다, 더 부러울 만큼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라.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샘난다, 더 샘날 만큼 행복한 엄마가 되어라, 하고. 


끝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 미운 감정도 예쁜 곳에 쓸 줄 아는 어른. 그러니까 매일매일 연습해야겠지. 언젠가 너를 만나게 된다면 얘기해 줄 수 있도록. 나는 너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괜찮은 어른이 되었노라고.




** Photo by Kate Krivane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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