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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i Dec 20. 2023

파리에서 살 집을 구하다.





파리에 혼자 가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아는 한국 사람들이 몇몇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잠깐 여행 온 대학 후배들부터, 블로그로 만난 친구, 같은 유학원을 통해 온 학생들과 원장님을 만나며 정신없이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침대에 누우면 '나 어쩌자고 여길 온거지...'하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갑갑하기도 했지만 해가 뜨고 아침부터 은행과 통신사, 어학원, 부동산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갔다. 


초반에 정착할 때는 유학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 또래의 젊은 원장님이 이 당시 처음 시작한 유학원이어서 매우 열정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셨다. 내가 두달만에 급하게 파리로 떠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도 거의 못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던 나는 원장님에게 의지하는 편을 선택했다. 프랑스의 행정 시스템은 복잡하게 꼬여있기도 하고, 인터넷보다는 우편과 통화로 해야하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파리는 집 구하는 게 정말 어려운데, 원장님 덕분에 정말 빠르게 집도 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유학원보다는 비쌌지만, 초반에 나 스스로 너무 힘을 빼지 않아도 되고,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되었기에 더 빠르게 새로운 도시의 삶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파리에서 내가 살게된 집은 6구에 있는 원룸 형태의 아파트였다. 뤽상부르 공원으로 통하는 작은 문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고, 피카소, 모딜리아니, 마티스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자주 찾았다는 La rotonde라는 식당 바로 옆 길에 있었다. 우리 집이 있던 아파트의 1층에는 미술도구 상점이 있었고, 옆 건물에는 루이스 부르주아, 알렉산더 칼더, 세르주 갱스부르 등이 다녔던 유명한 미술 아카데미도 있었다. 멋드러진 오스만 건축 양식은 아니었고, 투박한 시멘트 느낌으로 리모델링한 듯한 외관의 아파트였지만 그래서 비교적 깔끔했다.   






처음 집을 보러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오래된 목재 바닥은 조금 삐걱거렸고, 화장실 타일도 많이 떨어져나가긴 했지만 커다란 창과 분리된 작은 부엌이 마음에 들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이케아 서랍장과 책장, 퀸사이즈 매트리스가 남아있어서 딱히 가구를 더 살 필요도 없었고, 프랑스식 1층(한국식 2층)이라 조금 걱정했지만, 창 쪽은 사람들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아파트 소유의 뜰이라 안전해보였다. 

이 동네는 16구만큼 부촌은 아니지만, 아티스트들이나 학자들이 많이 사는 고즈넉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집을 보기 전부터 마음을 거의 굳힌 상태였다. 집 컨디션은 엄청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좋은 동네에서 이 정도의 조건은 없을 것 같아서 다른 집은 보지 않고 바로 계약을 하기러 했다. 



얼마뒤 집에 입주를 하고나서 보니 전자레인지, 냉장고, 인덕션 모두 낡긴 했으나 세탁기 상태는 너무 심각했다. 부동산 계약을 할 때는 집주인을 만날 일이 없었는데 세탁기 때문에 처음으로 연락을 해야했다. 정말 다행히도 영어를 잘 하는 집주인을 만나서 직접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어느날 오후에 집주인이 세탁기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집으로 왔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 밝은 초록빛을 띈 회색 눈동자를 가진 마담이 서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회갈색의 곱슬머리와 시원한 미소가 너무 아름다운 분이었다. 세탁기를 먼저 보고, 남편이 오는 것을 기다린다고 해서 잠깐 집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내 나이 즈음에 이 집에서 살았었다며,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집을 옮겼다고 했다. 원래는 저널리스트였는데 올해부터 유치원 같은 곳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아주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곳곳에 집주인이 남기고 간 흔적이 가득한 나의 집이 왠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좋은 집과 좋은 집주인을 만난 것이 파리가 나에게 주는 행운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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