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히 필요한 내비게이션
얼마전 티타임을 가졌다.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아시안.
여러 모임을 가보고 이 곳에 정착했다.
한 친구가 여기 온 지 오래되지 않았다.
삶이 힘들다고 했다.
나는 너무 공감했다.
이 곳은 당연한 모든 일이 당연하게 풀리지 않는 곳이라 했다.
벌써 세번째 파견인 그녀는
이 곳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작은 그룹들끼리 몰려다니고 “too cliquy”(파벌이 심한)
그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고 했다.
난 너무 이해가 간다고 했다.
또 여기 관계들이 너무 피상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또 동의했다.
파견지에 입성할 때, 많은 기대감에 부풀게 된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 그 곳에서 어떤 삶이 앞으로 펼쳐질지는 '사람'과 관련이 깊다.
주재원 짠밥 세번째이지만, 나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이 곳에서 깊이 깨달았다.
심지어 처음 파견 나온 주재원 와이프와 비교해봐도 우스울 정도였다.
큰 인고의 시간을 지나왔다.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일단 처음 적응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코비드 때문인지 더 오래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정리해봤다. 주재원 아내의 인간관계 지도가 어떠한지.
1. 공식 사교단체들
이 곳은 주재원 와이프들이 적응하기 위해 여러 모임들이 활성화된 나라이다.
이런 모임의 종류의 특징은 공식적인 단체라는 점이다. 해외 여러 곳에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도 있고, 로고가 있으며, 정관이 있고, 회장, 서기, 회계 등등 조직적이다.
이 곳엔 AWA(American Welcoming Association), Corona, Asian Women's Group 등 무슨무슨 클럽들이 너무 많다. 주로 사교클럽이다. 명목상 좋은 일을 하기 때문에, 펀드레이징도 많이 이루어진다. 특징은, 어떤 좋은 명목 가령 '암환자를 위한 펀드레이징'과 같이 호텔에서 개최 할 때는 입장권이 매우 비싸다.
대게 일반적인 모임은 그렇게 비싸지 않고 회원제로, 일정 회비를 내고 입회해서 참여할 수 있다. 영국단체도 있고, 미국단체도, 아시아 인들을 위한 단체도 있다. 특징은 누구나 올 수 있고 열려있다. 한 마디로 진입장벽이 낮다. 이 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에, 처음 적응하는데는 나름 입문하기 좋은 장소라 생각한다.
단점은 이런 곳에 가면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에너지가 소진될 수 있고, 또한 깊이 있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대다수의 경우가 두 번 안 볼 사람들. 그냥 어울리려고 가거나, 외로워서 가거나, 정보를 얻으러 가거나 정도이다. 아니면 너무 오래 이 곳에 살아서(교민의 경우), 그 곳에 친구들이 나가고 있어서 친구 만나러 간다거나.
한국사람들은 극소수의 경우를 빼면 주로 이런 클럽에 드나들지 않는데, 왜냐하면 영어라는 배리어도 있지만, 한국인들은 그들끼리 이미 잘 똘똘 뭉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저런 단체가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수 많은 음식 주문 창구, 중고물품 판매 등이 카톡창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서 굳이...
2. 한국인 엄마 모임
이 모임은 말 그대로 이 곳에 나와있는 한국인 엄마들이 모이는 모임이다. 이 엄마들은 운동하고, 끝나고 차마시고, 밥도 먹고, 또 수많은 모임들을 조직해서 함께한다. 독서모임, 운동모임, 성경공부, 글쓰기모임 등등. 단지, 공식단체와 다른 점은 비공식적이다보니 모임에 들어가게 되는 경로는 주로 그 모임 안의 누군가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진입장벽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분명히 있다. 진입장벽. 하...할말하않
또한, 이 좁은 사회에서 그들 중 하나와 틀어지거나 하면, 앞으로 그 그룹과는 바이바이이다. 바로 내 케이스처럼. 자의이던, 타의이던 상관없다. 앞으로 그곳에 소속된 그들 중 어느 누구와 만나도 불편한 감정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덤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부정적 감정의 스펙트럼은 열거하지 않겠다.
3. 외국인 엄마들 혼합 모임
외국인 엄마들은 나름 국적불문하고 많이 모인다. 주로 인종을 보면 백인들 위주의 모임이다. 가끔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소수로 끼어있다. 그들끼리는 또 통하는 법이니까. 이 곳에 참여하는 한국인은 더더욱 극소수이다. 이 모임도 누군가 초대해줘야 들어갈 수 있다.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있다. 나름 그들끼리 조직되어 있고, 모임 이름도 갖추고 있다. 열댓명 정도가 참여한다. 돌아가면서 티타임을 갖고, 호스트를 자처한다. 개도국 나라의 특성상 집이 맨션처럼 거대해서 파티를 하기 딱 좋다. 대게 가정부도 두고 살기 때문에, 호스트를 하는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정서가 백인 사회의 정서이다 보니, 동양인의 정서와는 또 다른 점들이 많다. 말하는 주제가 겹치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고, 다루는 주제가 좀 더 직접적이기도 하고, 서로 정보공유도 하는 그룹채팅창을 갖고 있다. 한국 엄마들처럼.
아. 이런 모임을 조직하고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외향적 성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매일 파티하고, 호스트하고 이런 거는 내향인에게는 너무나 안 어울리기 때문에...그리고 외국인들 중엔 이런 외향형이 퍽이나 많은 것 같다는 느낌(생각만 해도 피곤해지는...)
자신의 목소리 내는데 거침이 없고, 서로 오디오가 겹쳐도 더 크게 얘기하고 등 약간 동양의 서로 조심하거나 '양보하는' 정서랑은 괴리감이 있다. 몇 번 다녀와서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이 아닌 탈진되는 느낌을 받았다.
4. 아시안 엄마들 모임
한국엄마들 모임에서 범주를 조금만 더 넓혀가면, 아시안들이 있다. 주로 동족 모임 안에서 안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발적이든 아니든 무슨 이유로든 거기서 떨어져 나오게되면 가장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모임은 아시안 클럽이다. 비공식적이지만, 알아서 스스로 모임을 조직하고 친해지는 모임. 이 곳도 물론 한 명이 초대해줘야 들어갈 수 있기에 진입장벽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때까지는 접근불가. 적극적인 한 명이 모임을 만들어내고 주도한다(누가 주도하는지 유심히 보기를 바란다. 괜찮은 사람인지. 덥썩 미끼를 물지는 말자...). 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몽골, 대만, 중국, 기타 등등. 대부분 주재원의 와이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같은 나라 사람이랑 어울리기 보다는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주재원 와이프들끼리 더 동질감을 느끼고 같이 모인다. 이들의 영어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해외 주재원 경력 N년차 그녀들에게 영어로의 의사소통은 기본이다. 조금 덜 능통한 이들이 있다하더라도 이들과 정서교류는 훨씬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는 동양적인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만 동족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 언어 구사하면서 느껴지는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들은 영어 구사 능력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 것이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비슷한 결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아시안 클럽의 사람들은 매우 편안하게 느껴진다. 같은 동족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갈등이나 질투 이런 것들도 이 곳에선 크게 느낀 적이 없다.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모두들 누굴 부러워하지 않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거나 경제력을 갖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몇 달이 지나서 이 모임을 돌아본 결과, 그 안에서도 많은 역학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중에 떨어져 나간 멤버들도 있었다. 인간관계가 있는 곳은 갈등이 없는 곳은 없다.
5. 외국인 국적별 모임
외국인들도 국적별로 '모여라!'를 외친다. 주로 프랑스인. 하...할말 많다 프랑스인. 하지만 할말하않이다. 다 싸잡아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락다운 기간 동안 공원에서 모여있는 두 인종을 찾아보면, 하나는 한국인 하나는 프랑스인이다. 역시, 혁명가들의 후예답게, 조직적이고 잘 모인다. 그치만 뼛속까지 개인주의라 우리나라 정서랑은 또 너무 다르다. 일단, 오지랍이 넓은 우리나라 국민과는 다르게, 프랑스인은 자기와 관계가 없으면 철저하게 관심이 없다는 걸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니,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게 안전하다.
나머지 유로피안들은 대체로 잘 어울러지는 듯하다. 특징적인 건 이들이 프랑스인들은 싸잡아 싫어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아. 그렇구나. 역시 사람이 보는 눈은 다 비슷한걸까? 주로 프랑스인들은 자기나라 말만 고수하려고 들고, 국수주의에 빠져있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한 걸 보면, 외국사람들도 프랑스인들에게 쌓인게 한두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단체 채팅창에서 불어권 구사자들이 불어로 서로 소통하다가, 목소리 큰 이탈리아 엄마 한 명이 그만하라고 하고, 불어권 구사자들이 불쾌해하며 대거 탈퇴(?)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후에도, 그 모임에 나가면 불어구사자들의 뒷담현장을 볼 수 있었다...
백인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러시아 맘 한 명은 나한테, 유럽애들이 너무 시끄럽다며 자기는 그 그룹이 넘 시끄러워서 여기가 더 편하다며 아시아 클럽으로 이동하였다. ㅎㅎ 이건 또 새로운 사실이다. 동유럽이 보는 서유럽에 대한 시선은, 우리 아시아인이 백인 사회를 보는 눈과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동유럽은 더 조용하고, 더 공동체 중심이며, 타인을 의식한다는 점에서도 유럽 다른 나라들의 정서와 너무 달랐다.
유로피안 외에 다른 국적들도 자기네들끼리 끼리끼리 모이는 건 대부분인듯하다. 미국인은 미국인들끼리 남미는 남미끼리 등등. 동족을 찾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와 비슷하고, 내게 가까운 게 편안하기 마련이니까. 그게 언어가 됐든, 문화든, 깊이 깔린 정서든.
문제는 이런 모임들이 모두 진솔하지는 않고,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것이 주재원 와이프라고 해봤자 파견 나온 자들의 와이프들의 수가 얼마나 되며, 그 중 결이 맞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는가? 그냥 이 상황에 놓이게 된 이상 대부분 '대충 맞춰서' 생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한 언니도 있었다. '대충 지내는 거지 뭐'
기대수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애초에 친구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모인 곳은 서로 공통의 목적에 따라 모인다. 어떤 이들은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고, 따라서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어떤 특정 활동을 같이 하려고 모인다. 혼자 하기 어려운 활동, 혹은 정보교류. 그 곳에서 정서적인 충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목적은 이 어려운 곳에서 잘 헤쳐나가고, 잘 살아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주재원 와이프는 이역만리 타지에 왔을땐, 확대된 가족도, 친구들도 때로는 직장도 삶 전체도 모두 등지고 새로운 곳에 와 있는 사람들이다. 오직 남편과 아이와 함께. 그렇지만 남편은 직장에 가고 아이는 학교에 간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애초부터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는 이들은 속으로는 더더욱 외로울 수 밖에 없다.
반면, 친구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도,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을 때까지 좌충우돌이다. 그렇게 마음에 맞는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곳은 살 수 있는 곳이 된다. (아...회사의 인간관계 얘기할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음에 맞는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그 말.) 그때까지가 멘땅에 헤딩하듯 지난한 과정이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상처도 많고, 자신이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상처들도 들여다봐야되고, 그렇기 때문에 고난하다. 그치만 그나마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다행이다. 대부분 내가 만난 이들은 그냥 그러려니 저 마음 속 깊이 여러 아픈 상처들을 묻어두거나 살기 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매번 새로운 환경에 던져지게 되는 주재원 와이프는 아픈 만큼, 아픔을 허용한만큼 성숙해진다. 나는 이 곳에서 나를 싫어하거나 내게 무관심한 사람들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도 찾았다. 이런 것에서 좀 초연해졌다. 나는 이 곳에서 성장통을 앓았지만, 그만큼 많이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