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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Sep 09. 2017

베트남: 하노이의 자부심, 분짜

오바마를 사로잡은 하노이의 맛


베트남에 가본 적이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 가본 적이 없기도 하다. 그곳의 사람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그들의 음식을 함께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베트남을 방문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유명 여행사가 주관하는 패키지여행을 통해서였다. 지금은 다낭이나 호이안 같은 관광도시가 발달하여 다양한 콘셉트의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베트남을 여행한다고 하면 하롱베이와 호치민, 하노이를 떠올리는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거기에다 우리 가족이 선택한 코스는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미덕인 패키지여행의 정수와도 같았다. 한 나라로는 부족하여 인접한 캄보디아까지 5박 6일의 일정에 전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저장해둔 사진을 둘러보니,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하노이 관광, 안마와 인력거 체험, 하롱베이 유람선 관광, 씨엠립 관광, 앙코르왓과 톤레삽 호수 관광, 그리고 네다섯 번의 쇼핑센터 방문 등을 부지런히 소화해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베트남의 풍경과 나 사이에는 닦은 지 오래되어 흐린 버스의 창문보다 더 희뿌연 막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여행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달리는 버스에 앉아 뿌연 버스 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베트남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버스 밖의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오토바이와 자전거의 홍수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타고 유유히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치이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달리는 오토바이를 등지고 삼삼오오 조그만 플라스틱 의자에 모여 앉아 김이 풀풀 나는 쌀국수를 먹고 있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베트남의 풍경과 나 사이에는 닦은지 오래 되어 흐린 버스의 창문보다 더 희뿌연 막 같은 것이 씌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고 거리의 냄새와 소리는 열리지 않는 버스 유리창으로 인해 나에게서 완벽하게 차단되어 버렸다. 이따금 새된 경적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중년의 손님들은 점잖아서,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을 때를 제외하면 버스 안은 바깥의 북새통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했다. 버스는 관광지와 관광지 사이를 편리하게 잇는 수단이었으나 동시에 거리와 삶의 냄새로부터 관광객을 철저히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따금 새된 경적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저 사람들은 뭘 먹고 있나요?"



내가 물었을 때 중년의 가이드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었다. 몇 분 전에 손님들의 여권을 담은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파란만장한 사건에 대한 긴 연설을 끝낸 참이었다. 시내를 통과하며 심해진 교통체증으로 인해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창 밖의 오토바이 떼를 구경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진 중년의 손님들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심심풀이가 필요했었고, 눈치 빠른 가이드는 그들이 필요한 한 판의 구연동화를 막 끝낸 터었다. 자고로 수십 명의 패키지 관광객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그런 때를 위해 감초를 팍팍 뿌린 흥미진진한 경험담이나 사실일지 과장일지 모를 신기한 현지 사정을 수십 개는 기억해 두고 있기 마련이다.


이드의 구성진 경험담을 들으면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침묵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주변의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그래도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이 아직 재미있었다. 골목을 돌고 돌 때마다 거리의 풍경은 조금씩 바뀌었다. 그럼에도 허름한 식당 앞 길바닥에 의자를 펴고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먹는 사람들의 무리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저 사람들은 뭘 먹고 있나요?


"저 사람들이 먹는 게 뭐예요?" 나는 창 밖의 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는 가이드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하지만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허리를 돌려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가이드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내 질문은 분명 일장연설의 의무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그의 휴식을 깨어버렸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기어오르려는 찰나, 눈치 없는 앳된 질문자의 얼굴을 확인한 가이드는 즉답 대신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다시 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마이크를 쥐고 관광객을 마주하고 선 가이드는 자리에 앉아 피곤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던 어느 중년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버스 안에 그의 힘차고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자, 지겨우시죠?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창 밖에 사람들 보이시죠? 저기 길에 앉아 뭔가 열심히 먹고 있잖아요? 옛날이면 몰라도 요즘 한국 같으면 저렇게 길에 쭈그리고 앉아 먹지는 못할 텐데, 거기다 저렇게 뜨거운 걸 손에 들고 먹다니 참 신기하기도 하죠. 지금 이 시간에 먹는 요리라면 쌀국수나 죽 같은 걸 텐데요, 먹어보면 맛은 썩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런 데서 먹기는 좀 그렇죠. 저는 바쁘면 사무실에서 나와서 저렇게 앉아서 먹곤 하는데요, 저희 마누라나 딸내미는 저런 데서는 절대로 안 먹지요. 덥기도 하고, 지저분하기도 하고, 길에 매연도 심하고."


저런데서는 절대로 안먹지요.



자유여행 대신 패키지 관광을 선택한 관광객들은 고민과 고생, 고통의 순간 없이 앉아있으면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편안한 여행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관광객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들이 대접받는 느낌을 받게 함과 동시에 가이드와 운전수, 여행사를 위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여행사의 몫이다. 따라서 식사는 여행사가 미리 지정한 곳에서만 이루어졌다. 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위생상태와 한국어가 가능한 종업원을 갖춘 규모가 있는 식당이었고 사장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노점 음식을 관광객으로부터 차단함으로써, 여행사는 현지 한국인 사이의 경제 공동체의 이익 증대에 기여하고 혹시 모를 질병과 불편으로부터 관광객을 보호했다.


중년부부가 대부분이었던 관광버스 안에서, 바깥의 현지인들이 매연과 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쭈그려 앉아 먹고 있는 요리를 먹고자 제안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나 또한 그러한 일탈을 실행할 추진력은 없었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거리의 음식을 경험하기는커녕 그 거리를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덩어리가 희미하게 기억날 뿐 거리의 소리와 냄새는 기억의 흔적조차 없다.







10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여행의 풍속 또한 크게 변화해서, 이제는 한국인 사이에서도 '스트릿 푸드 탐방'이 여행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패키지여행 또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기 어려운가 보다. 일정을 계획하고 관광객을 보호하는 이전의 원칙에서 벗어나 '자유여행 1일 포함'이나 '나이트 스트릿 투어 옵션, 칵테일과 안주 제공' 등의 형태로 관광객에게 현지의 거리를 걸어볼 기회를 제공하는 여행상품이 눈에 띈다.


하지만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여행의 미덕을 존중한다고 한들, 국빈급의 손님을 데리고 거리의 노점에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5달러도 안 되는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지난 2016년 5월에, 온 베트남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다. 두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성공적인 미국의 요리사이자 TV쇼 진행자,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앤써니 보댕(Anthony Bourdain)이다. 지금처럼 세계를 여행하며 온갖 요리를 맛보고 이를 유튜브 등지에 올려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시절, 그는 이미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요리를 소개하는 TV쇼를 수 차례 찍은 전력이 있었다.


어느 국가원수를 수행하는 비서가 비밀리에 그에게 접촉하여 '이번에 중요한 일로 베트남을 방문하게 된 그분을 모시고 갈만한 베트남 요리 전문점을 추천해달라'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순간 '그분'이 예의 그 새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그 요리'를 먹는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요리'는 하노이 사람들의 영혼의 음식 '분짜'이며, '그분'은 바로 미국의 당시 현직 대통령, 버락 오바마였다.




"아, 덕컹거리는 저 파란 플라스틱 의자, 저게 바로 베트남이지"(Chi Mai라는 이의 댓글). 대통령과 앤써니 보댕 사이에 무심하게 떨어진 빨간 빨대가 유난히 신경쓰인다.



"대개 정보기관은 힐튼 호텔의 연회장 같이 좀 더 통제 가능한 상황을 더 선호합니다. 적어도 에어컨과 탈출 경로 몇 개 정도는 확보할 수 있는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은 되어야겠죠. 하지만 우리는 파격적으로, 어느 작은 식당 2층에 자리를 잡았어요. 노동자들이 찾고 작은 가족이 운영하는, 하노이의 평범한 식당에서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던 겁니다."



온라인 푸드 매거진 "ROADS AND KINGDOMS"와의 인터뷰에서, 앤써니 보댕은 오바마와의 저녁식사에 대해 그만이 알고 있던 사건의 진실을 설명했다. 물론 당시 현직에 있던 오바마가 베트남을 찾은 것은 단순히 분짜 때문일 리는 없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수십 년간 유지되었던 베트남에 대한 무기거래 금지를 완화하는 계획에 대한 회담을 가지는 것이 그의 가장 핵심적인 방문 목적이었다. 앤써니 보댕과 하노이 뒷골목의 분짜 식당을 찾은 것은, 앤써니 보댕이 진행하는 CNN 여행쇼, "Parts Unknown"의 촬영에 게스트로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고, 굳이 보안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름 동네에서 유명하기는 해도 허름하기 그지없는 분짜 식당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앤써니 보댕도, 백악관도 그 목적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명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사진이 하노이 사람들에게 퍼지고 보댕이 경험한 일들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 어렴풋이 짚이는 바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ROADS AND KINGDOMS"지의 인터뷰에서 따온 대화이다.


Q: 허름한 분짜 식당에서 오바마와 식사를 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A: 다음날 길을 걷거나 스쿠터를 타고 베트남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사람들이 제 팔의 문신을 보고 사진 속에서 봤던 그 남자가 저라는 것을 알아차리더군요. 아예 저를 보고 손가락을 가리키며 "미스터 분짜! 미스터 분짜!"를 외치는데, 흐느끼고 눈물을 터뜨리고 잘 이어지지 않는 영어로 설명을 하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오바마가 쌀국수나 스프링롤 같은 것을 먹지 않고, 좀 더 수준 있는 퓨전 레스토랑 같은 데를 가지 않았다는 것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믿기지 않았는지를요. 어떻게 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올드 쿼터의 분짜 식당을 딱 골라서 먹었는지, 어쩌다 분짜를, 그들의 음식을,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노이 사람들의 분짜를 먹게 되었는지 말이죠. 그들은 정말 충격을 받고 감사하고 또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어떤 작은 부분이, 작지만 일상에서 필수적인 바로 그 부분이 미국의 대통령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요. 참고로 그 대통령이란 사람은 그날 저녁식사를 정말로 맛있게 먹었답니다.


하노이의 거리에서 앤써니 보댕과 대화하는 버락 오바마. (2016년 5월 24일, 백악관 공식사진 by Pete Souza)



그렇다. 베트남의 요리라고 하면 분짜보다는 쌀국수나 월남쌈을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은 비단 한국의 사정만은 아니다. 하노이 시민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놀란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자신들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서, 자신들이 숨 쉬는 공간에 앉아 자신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것에 말이다. 물론 스프링롤도 그렇지만 쌀국수 또한 분짜 못지않게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음식이다. 분명 오바마가 어느 허름한 쌀국수 식당에서 뜨끈한 쌀국수를 마셨어도 시민들은 따뜻한 환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하노이 시민들이 이토록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열광한 것은 엄연히 '분짜' 본유의 힘이다. 베트남을 제대로 찾은 적이 없는 외국인이 베트남의 요리를 떠올릴 때 일상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요리, 더 유명한 요리의 그림자에 가리어져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요리, 그리고 하노이 사람들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일상의 요리가 바로 분짜이다.




분짜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면 도대체 분짜라는 음식이 어떤 음식이기에, 얼마나 맛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나 궁금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분짜(Bún chả)는 버미셀리 국수를 곁들인 석쇠구이 요리로, 보통 여기에 다양한 채소를 푸짐하게 곁들여 먹는다. 분(Bún)은 쌀국수를, 차(chả)는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를 의미하는 말이니 상당히 직설적인 요리명이라 할 수 있다. 보통은 양념한 돼지고기를 석쇠에 구워서 만드는데, 다진 고기를 완자 형태로 뭉쳐서 만들기도 하고 고기 덩어리를 그대로 굽기도 한다. 한국의 재래시장 골목에서 맛볼 수 있는 돼지고기 석쇠구이와 만드는 모양새가 비슷하여 친근함이 느껴진다. 시장통 뒷골목으로 돌아서면 매캐하면서도 달달한 냄새가 풍겨 집으로 돌아가던 이들을 불러 세우는 것처럼, 하노이의 식당 골목을 걸으면 이 분짜의 냄새가 온 거리를 가득 채운다고 한다.



석쇠 위에서 익어가는 돼지고기.    -사진 출처: www.incensetravel.com


한국의 돼지고기 석쇠구이와 다른 점 이 분짜라는 요리가 엄밀히 말해 세트요리라는 사실이다. 석쇠에 익힌 돼지고기 외에도 쌀국수와 각종 허브, 그리고 이를 찍어먹을 피시소스가 없으면 분짜가 완성될 수 없다. 조금만 삶아도 부드럽게 익는 가느다란 버미셀리 국수가 다소곳이 접시에 담겨서 나오고, 다른 접시-혹은 플라스틱 소쿠리-에는 베트남 바질인 랑 바질(Láng basil), 깻잎과 비슷한 잎채소, 숙주, 상추, 디엡카(diếp cá)라고 불리는 피시 민트 등이 산처럼 쌓여서 나온다. 여기에 고기와 국수, 채소를 찍어먹을 소스가 밥공기 만한 사기그릇에 담겨 나오는데, 이 소스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피시소스(느억맘)가 듬뿍 들어가 있다. 식초와 설탕에 절인 당근과 차요테(chayote)를 약간 곁들여 새콤요소를 더하면 비로소 분짜 한 세트가 완성된다.



채소, 국수, 고기 등 다양한 요소를 한데 갖추었다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하노이 사람들에게 이 분짜가 더더욱 특별하다. 하노이 사람들 뿐 아니라 베트남 전체가 분짜가 하노이의 요리라는 것을 인정할 정도로 분짜는 하노이의 대표 요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노이 인근을 벗어나 남쪽으로 이동하면 분팃누옹(bún thịt nướng)이라는 요리가 분짜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분팃누옹은 고기와 채소, 쌀국수, 피시소스가 들어가는 것이 분짜와 매우 비슷한 요리이다. 하지만 각 재료를 따로 담아내었다가 찍어먹는 요리가 아닌 '한 그릇 요리'라는 점에서 분짜와 차이가 있다. 또한 분팃누옹에 들어가는 소스는 분짜 소스보다 더 달짝지근하고 매콤하다고 한다.


분짜의 사촌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 분팃누옹       -사진출처: www.foody.vn


분짜는 대체 언제 만들어지기 시작한 요리이며, 왜 하노이 사람들은 고기와 국수, 채소를 따로 담아서 피시소스를 담은 종지에 찍어먹는 방법을 고집하게 되었는지, 또한 왜 다른 지역에서는 분짜가 아닌 분팃누옹을 먹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는 베트남의 혼란스러운 현대사 속으로 흘러 날아가 버려서 그 답을 아는 이가 없다. 베트남의 문학가이자 저널리스트 부방(Vu Bang, 1913-1984)은 1959년의 저서를 통해 하노이를 "분짜에 사로잡한 도시"라고 묘사한 바가 있다. 이 기록이 분짜에 관련해 현재까지 전하는 그나마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이다. 1959년의 하노이. 19년간 이어지며 기다란 베트남 땅을 샅샅이 흝고 지나간 베트남 전쟁의 개전일과 종전일이 1955년과 1975년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어느 한 요리의 역사가 오롯이 기억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1972년 하노이를 강타한 "크리스마스 폭격" 이후의 Kham Thien 거리. 하노이 호아로(Hoa Lo) 박물관 소장.



현재의 Khan Thien 거리. 폭격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사진 출처: www.myhanoitours.com






베트남의 요리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글이니만큼, 베트남의 요리 재료에 대해 간략히 다룬 후 분짜 요리법을 소개하려 한다.



1. 베트남의 요리


베트남을 대표하는 요리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쌀국수와 월남쌈이다. 모두 쌀가루가 사용되는 요리인데, 최근에 인기가 높아진 반미 샌드위치의 바게트 빵에도 쌀가루가 들어간다. 엄연히 쌀문화권에 소속된 국가인지라, 베트남의 식재료를 언급할 때는 쌀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베트남 요리의 향을 지배하는 것은 찌릿한 피시소스의 향과 시원한 고수의 향, 상큼한 라임의 향이다. 특히 베트남 사람들은 '느억맘(nước mắm)'이라고 불리는 베트남식 피시소스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는다. 발효된 생선 특유의 지릿한 향에 감칠맛이 풍부한 소스이다. 신맛과 상큼한 향으로 풍미를 배가시키는 일은 라임의 몫이며, 시원한 고수의 향은 고기요리의 묵직하고 기름진 느낌을 잡아준다.



2. 베트남의 요리 재료


<왼쪽부터> (검은깨)라이스페이퍼, 타마린드, 레몬그래스, 라임즙, 피쉬소스, 고추, 마늘, 생강, 간장, 쌀국수


<향신채>      

-라임(lime):

쌀국수를 먹을 때도, 반미를 먹을 때도 새콤한 라임즙이 필수이다. 담백한 맛의 한국의 베트남 요리와는 달리, 본토의 베트남 요리는 고기 향과 향신료의 향이 한국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강하다고 한다. 베트남 요리에  라임이 필수적인 이유이다. 생라임을 구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시판 라임즙으로 대체 가능하다.


-고수(cilantro):

한국요리의 마지막에 쪽파를 곱게 썰어 올리는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 요리의 마무리는 고수의 역할이다. 보통의 한국인이 화장품 같기도 하고 향수 같기도 한 고수 향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없을 때 섭섭하게 느낄 정도로 즐기게 된다. 한국에서는 은근 구하기가 어려운데, 백화점 식품매장, 세계 식재로 상점, 재래시장(가끔. 항상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에서 구할 수 있다.


-레몬그래스(lemongrass), 고추(chili peppers)


<향신료>

-스타아니스(Star anise):

쌀국수 육수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재료이다. 한약 향이 강하다.


-정향(clove), 시나몬(cinnamon), 통후추(pepper)


<소스, 통조림, 건조식품류>

-피시소스(느억 맘, nước mắm):

온갖 쌀로 만든 면을 베트남 요리의 살에 비유한다면, 피시소스는 베트남 요리의 피에 해당한다. 생선살을 발효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찌릿한 향과 감칠맛, 짠맛이 특징이다. 베트남 요리의 각종 소스에 요리조리 자주 사용된다. 고기 국물 소스에 찍어먹는 면인 분짜(bun cha)는 순전히 피시소스 맛으로 먹는 요리라고 할 수 있다.


-튀긴 샬럿 또는 튀긴 양파 가루:

한국요리의 마지막에 참깨나 쪽파를 뿌려 마무리하듯이, 베트남 요리의 마지막에는 튀긴 샬럿(또는 양파) 가루를 올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직접 만들 수도 있고, 세계 식재료 상점에서 봉지에 넣어 파는 것을 구매할 수도 있다.



포 누들, 버미셀리 누들, 라이스페이퍼


<면>

-버미셀리 누들 (분, bún):

뜨거운 국물에 말아먹기보다는 실온에서 소스에 적셔먹는 형태로 먹는다. 월남쌈에 곁들여 같이 싸 먹는 것이나 고기육수에 찍어먹는 분짜(bun cha)가 대표적이다.


-포 누들 (반 포, bánh phở):

쌀국수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면이다.


-라이스페이퍼(반 트랑, bánh tráng):

월남쌈(고이 꾸온 Gỏi cuốn, summer roll)과 춘권(짜조 Chảgiò, spring roll)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이다. 피자와 비슷한 길거리 음식인 반트랑누옹(bahn trang nuong)을 만드는 데에도 쓰인다.


*구매 팁:

레몬그래스와 튀긴 양파가루를 제외하고 모두 대형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세계 식재료 전문점이나 백화점 식품매장에도 베트남 요리 재료가 잘 갖추어져 있다. 누들이나 라이스페이퍼는 2~3천 원 대에 구입할 수 있으며 피시소스는 3천~5천 원 사이이다. 스타아니스는 얼마 전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한 병에 4천 원을 주고 구입했다. 튀긴 양파 가루는 3천 원 정도에 세계 식재료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참고한 레시피 동영상]

Bún chả - Vietnamese Grilled Pork with Vermicelli Recipe by Helen's Recipes (Vietnamese Food)

https://www.youtube.com/watch?v=iZJzTScgB-c




[분짜를 위한 재료]


- 돼지고기 500g (목살을 사용했는데 지방과 살코기의 비율이 적절하여 부드럽고 담백했다)

- 각종 잎채소

- 버미셀리 누들 적당량


<돼지고기 마리네이드 재료>

- 다진 마늘 1 tbsp

- 다진 샬럿(또는 양파) 1 tbsp

- 굴소스 1 tbsp

- 설탕 1 tbsp

- 꿀 1 tbsp

- 고형 치킨 스톡 1 tsp

- 후추 1/2 tsp


<피클 재료>

- 슬라이스 한 콜라비, 당근 각각 1 컵 (나는 당근만 사용했다. 콜라비 대신 무를 사용해도 좋다)

- 소금 2 tsp

- 설탕 1 tbsp

- 식초 2 tbsp


<찍어먹는 소스 재료>

- 물 3 컵

- 피시소스 1/2 컵

- 설탕 1/2 컵

- 다진 마늘과 다진 고추 약간


또는 물과 피시소스, 설탕을 6:1:1로 사용.

기호에 따라 레몬즙 또는 라임즙을 먹기 직전에 추가.




[분짜 조리법]

1. 돼지고기를 한 입 크기로 자른다(돼지비계를 별로 즐기지 않아 비계 부위는 따로 떼냈다).


2. '돼지고기 마리네이드 재료'를 손질한 돼지고기와 섞는다. 비닐봉지나 랩으로 밀폐시킨 후 30분~1시간 동안 냉장실에서 재운다.


3. 당근(과 콜라비 또는 무 등의 뿌리채소)은 둥글게 슬라이스 하거나 반달 썰기 한다. 소금을 넣고 고루 섞어 당근에서 물이 배어 나오기를 15 분간 기다린다. 당근에서 물기가 빠져나오면 흐르는 물에 소금기를 흔들어 씻은 후 남아있는 물기를 짠다. 설탕과 식초를 넣어 1시간 정도 상온에서 절인다.



4. 찍어먹는 소스 재료인 물과 설탕, 피시소스를 냄비에 넣고 설탕이 녹을 때까지 끓인다. 설탕이 녹으면 잘 휘저은 후 불에서 내려둔다. 레몬즙이나 라임즙, 마늘이나 고추는 먹기 직전 먹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담으면 된다.



5. 마리네이드 한 고기를 석쇠에 올려 야외에서 석쇠구이를 하거나, 뜨겁게 데워 기름을 두른 팬에 익힌다. 팬에 구울 때에는 고기에 설탕 양념이 묻어 있으므로 이것이 팬 바닥에 눌어붙어 타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스테인리스 팬을 사용하는 경우의 팁:

- 팬을 미리 시즈닝해 두는 것은 기본이다. 또한 고기를 올리기 전에 팬을 충분히 달구고 기름을 1 Tbsp 정도 두른다. 기름을 미리 두른 채로 팬을 달구면 기름이 연기를 내며 탈 수도 있으니 주의한다.

- 고기를 올렸다면 팬에 들러붙은 고기를 억지로 떼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스테인리스 팬에 붙은 고기는 닿은 표면이 다 익어서 굳으면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 마리네이드 양념에 설탕이 있기 때문에 프라이팬 바닥에 눌어붙어 타기가 쉽다. 스테인리스 팬의 장점(디글레이징이 가능하다는 점)을 백분 활용하여 바닥에 눌어있는 타기 직전의 양념 위에 익어가는 고기를 문질러 고기가 양념을 닦아내도록 한다. 프라이팬이 타는 것을 자연스럽게 막을 뿐 아니라 고기에 양념이 잘 배어나게 된다.



빤들빤들 맛있게  잘 익었다!


6. 모든 재료를 한 상에 차린다. 찍어먹는 소스는 개인용 소스 그릇에 그릇을 절반 정도 채우는 높이로 담는다.



평소와는 달리 여러 그릇을 한꺼번에 사용하게 되어 그릇 간의 조화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놀랍게도, 모두 구매처가 다른 접시들임에도 불구하고 깜찍하게 잘 어우러졌다! 타원형의 잎 싸귀 접시는 코즈니에서, 뾰족한 잎 싸귀 접시는 다이소에서, 사발과 종지는 오키나와의 다이소에서, 조개 접시는 오사카의 시장에서 구매한 것이다.



그릇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요리조리 둘러보니 오랜만에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탕이 캐러멜 라이하면서 고기가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익었다.




이제 개인용 소스 그릇에 기호에 따라 다진 마늘, 고추, 라임즙 등을 더한다.







소스에 면을 넣고


고기도 살짝 담갔다가


한꺼번에 먹는다.




어디서 먹어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했더니, 수년 전에 유행했던 '육0냉면'과 어딘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지근하고 달콤 짭짤한 국물에 가는 면과 양념한 고기를 한데 곁들여 먹으니 더욱 그런가 보다. 그런가 하면 동네 고기구이집에 가면 개인별로 놓여있던 절인 양파 접시도 생각난다. 새콤달콤한 소스에 고기를 찍어 갓 절인 아삭한 양파를 곁들여먹으면 기름진 고기를 먹는 죄책감도 상큼하게 풀어졌더랬다.




그러나 한국의 고기구이와 분짜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유사한 한국의 요리와 분짜를 구별하는 가장 굵다란 구분선은 아무래도 피시소스의 존재이다. 발효된 생선 특유의 찌릿한 향과 넘쳐나는 감칠맛이 분짜가 이국의 요리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애초에 피시소스로 마리네이드 한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투명한 쌀국수 면과 각종 쌈채소의 종착역 또한 피시소스이다. 면과 고기, 채소가 각각 따로 담겨 나오는 것은 세 가지 재료가 피시소스 안에서 하나의 요리로 융합하는 과정을 먹는 가 스스로 이끌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지라 분짜로 시작한 여행은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자. 어느 강대국의 대통령을 모시는 비서가 당신에게 비밀스럽게 접촉해온다. '대통령이 진정한 한국요리를 맛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이다. 당신은 이 대통령을 위해 어떤 요리를 추천하겠는가?


분짜를 먹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가, 나는 고기 굽는 연기가 풀풀 쏟아져 나오는 어느 시장통의 뒷골목이 떠오른다. 각지고 굵은 폰트가 돋보이는 은행 달력이 삐뚜름하게 벽에 걸려있는, 고장난지 오래된 에어컨을 대신하여 구닥다리 선풍기가 좌중을 둘러보며 쉼 없이 덜컹거리는 시장통 뒷골목의 고깃집 겸 술집이다. 선풍기는 골목을 향해 트인 화덕에서 고기를 구워내는 사장님 등 뒤에도 하나 있다.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사장님의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식힐 뿐 아니라 석쇠에서 휘몰아 오르는 매캐한 연기 또한 거리를 향해 쏟아낸다. 이윽고 땀에 범벅이 된 사장님이 한 손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납작한 스텐 접시에 돼지 불고기가 가득이다. 당신과 대통령은 고기가 구워지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서 이미 빈대떡과 소주를 주문하여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시작한 상태였으나, 맛있게 그을은 돼지고기 접시 앞에서는 새로이 환호할 수밖에 없다. 고기의 기름기를 머금은 입 안을 타고 도는 소주는 더욱 감미롭다.


대통령에게 선보이고 싶은 또 다른 비밀의 식당이 있다면 꼭 나에게도 추천해주시길. 또 만약 하노이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수줍어서 관광버스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를 대신하여 분짜를 실컷 맛보고 돌아오시길!






"크리스마스 폭격" 사진 http://davidbaconrealitycheck.blogspot.kr

Roads and Kingdoms 매거진, 'Going Fishing' by Naomi Duguid http://roadsandkingdoms.com/2012/following-the-fish/

Roads and Kingdoms 매거진, 'Mr. Bun Cha: A Q&A with Anthony Bourdain' http://roadsandkingdoms.com/2016/mr-bun-cha-a-qa-with-anthony-bourdain/

'A Ballistic Bowl Of Bun Ch'a by Graham Holliday http://roadsandkingdoms.com/2016/a-ballistic-bowl-of-bun-cha/

'Why bún chả was the perfect dish for Obama and Bourdain to eat in Hanoi'   https://www.pri.org/stories/2016-05-24/why-b-n-ch-was-perfect-dish-obama-and-bourdain-eat-hanoi

Inside the Hanoi Restaurant Where President Obama and Anthony Bourdain Dined Last Night

https://munchies.vice.com/en_us/article/gvkmaj/inside-the-hanoi-restaurant-where-president-obama-and-anthony-bourdain-dined-last-night

Six things about the $6 Bourdain-Obama meal http://www.bbc.com/news/world-asia-36365988

위키피디아: Vietnamese cuisine   https://en.wikipedia.org/wiki/Vietnamese_cuisine

위키피디아:Bun cha     https://en.wikipedia.org/wiki/Bun_cha

위키피디아: Bún thịt nướng https://en.wikipedia.org/wiki/B%C3%BAn_th%E1%BB%8Bt_n%C6%B0%E1%BB%9B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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