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이 Oct 18. 2022

초초해하지 않는 나

[25/100] 도전 : 1일 1글쓰기 - 프로젝트 '좋아해'

백수 6개월에 접어들었다. 6년을 일하고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해고된 회사에서는 위로금 조로 다음 달의 월급을 지급해줬다(프리랜서이기에 몇 년을 일하든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 우선 한 달에 나가는 고정금을 정리했다. 통신료와 생활비를 제외하곤 보험금, 건보료, 국민연금과 대출 상환이 전부였다. 줄일 수 없는 걸 줄여야 해서 너무 막막했다. 가장 먼저는 해촉 증명서를 발급받아 건보료를 줄이고 국민연금을 정지했다. 원금과 이자가 함께 나가는 보금자리 대출은 원금 상환을 1년 유예하는 것으로 지출을 줄였고, 엄마에게 따로 빌린 대출금(은행 full대출이었기에 모자란 돈은 엄마가 따로 대출을 받아줬다)은 양해를 구하고 원금과 이자 모두 내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생활비가 필요해 엄마한테 또 돈을 왕창 빌렸다. 따지고 보면 세 달치 월급으로 5개월을 살았고, 그 가운데 운전면허도 취득했다. 그리고 다시 통장 잔액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20대에는 서른 살이 되면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모아둔 돈도 넉넉해 커리어우먼으로 멋지게 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른 살, 나는 고도의 업무 강도에 혹사한 몸을 지키지 못한 채 급성담낭염으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간수치가 정상의 5배는 높아져 있어 간수치를 내리는 데만 3일이 걸렸다. 그리고 서른다섯 살에는 앞으로 5년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 마흔 살에도 여전히 지금처럼 불안정한 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생전 없던 불면증을 겪었다. 그리고 올해를 몇 달 안 남겨둔 지금은 다시 진로 고민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방송 작가 일을 시작한 지 몇 년 안 됐을 때, 매일 밤샘에도 월급 100만 원을 넘기기 힘들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었다. 그때 대학 동기 언니가 '아는 작가님은 10년 차인데 아직도 이 길이 내 길인지 모르겠'다더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 말이 맞았다. 13년을 방송 작가로 글을 써 밥벌이를 했는데도 아직 이 직업이 나에게 맞는 직업인지 헷갈린다.  잘 하는 지도. 더욱이 요즘에는 더 이상 이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어 더 괴롭다. 그러면 뭘 해야 할까. 지난 5개월은 매일 그걸 고민했다. 그러나 딱히 취미라고 가져본 적이 없고, 다른 직업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도무지 뭘 해야 하는지 또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몰랐다.


배운 게 도둑질이다.

배움에는 때가 없다.


이 두 속담이 나를 몇 날 며칠이고 괴롭혔다. 배움에는 때가 없음이 분명하지만 돈이 필요했다. 집 꾸미는 걸 좋아하고 손으로 만드는 걸 잘하는 편이라 예전부터 목공이 배워보고 싶었지만, 목공은 제법 비싸다. 지난해 터프팅이 유행하면서 펀치 니들로 하는 터프팅을 배웠는데 흥미가 있어 본격적으로 배워보려고 해도 나에게 예산은 0원. 그렇다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비교적 쉽게(여전히 밤샘이 많겠지만, 보다 익숙하기에) 돈을 벌 수 있는 방송 작가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데? 치킨을 먹고 싶어도 10번은 고민하고 주문해야 하는 지금의 주머니 사정으론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사치일지 모른다. 앞으로 추워지는 계절에 보일러도 돌려야 하는데 당장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상과 현실이 타협하지 못하고 시간만 째깍째깍 간다.


이런 중에도 매일 두 끼, 때마다 배가 고프고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은 많다. 무더운 날씨와 재해였던 비바람 속에서 시원하고 쾌적한 실내에서 여름을 나고, 집에 해가 가장 예쁘게 드는 가을에 ‘오히려 좋아!' 온몸으로 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면 내가 너무 철이 없는 걸까. 누구는 오히려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무기력하고 게으른 거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만큼은 나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 졸업 이후 바로 알바를 하며 자취를 시작했고, 또 바로 취직을 해서 달려온 13년의 시간. 이제 숨을 몰아 쉬려는데 모두가 지금 이렇게 쉬는 게 나쁘다고 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물론 모아둔 돈이 있었다면 너무 좋고 더 풍족했겠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생각하자. 일말의 초조함을 덜고.




이전 18화 느슨한 연대가 좋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