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에 대하여
나는 취미 부자다. 좋아하는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관심사도 다양하다. 해본 것도 다양하다. 빨리 배우기도 하고 특출나게 못하는 것 없이 (하지만 또 동시에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이) 잘 해내는 편이다. 이런 내가 두려워하는 건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이다. 꾸준히 하는 거 당연히 어려운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꾸준히를 쉬워하는 사람은 드물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지속하기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뭘까?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뒷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될까 안될까 보다 된다는 긍정 회로가 발달한 편이라 시작은 곧잘 하는 편이다. 이런 성격은 내게 무수히 많은 기회들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나를 짓누르는 건 일정 기간 뒤 찾아오는 노잼 시기, 그리고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일 테다. 아직도 서랍에는 중학교 때 시작해서 마무리하지 못한 십자수가 있고, 작년에 시작해서 끝내지 못한 온라인 국제요가 지도사 자격증 과정도 있다. 왜 시작한 걸 아름답게 마무리 짓지 못하는가. 유종의 미를 맛본 지가 꽤 오래되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배우는 시기에 굉장한 재미와 '모름'에서 오는 약간의 스트레스를 통한 도파민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손에 익숙해지는 안정권에 접어들게 되면 급격히 흥미를 잃는다. 안정감에서 오는 재미의 급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애나의 북모닝을 통해 함께 읽고있는 신수정 님의 <일의 격>을 통해 어쩌면 이건 '지루함'이라는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과 재미라는 감정이 나를 움직여 시작하게 하고,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나를 멈춰 서게 했다. 감정이 내 삶에, 의사결정과 행동에 이렇게나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감정이 내 삶을 쥐락펴락하게 내버려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들 말하는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감정이 나를 휘두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이런 것도 능력이라고 볼 수 있나? 볼 수 있겠다.
이 또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일 테니.
지속하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조금은 색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어떻게 꾸준히 할까를 고민하기보다, 이 지루함을 어떻게 재미로 바꿀지를 고민해야겠다.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다.
지루함을 멈추는 그때부터 그 사람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신수정 <일의 격> p.37
성장과 지루함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당신이 그저 기분이 좋을 때 환경이 허락될 때만 어떤 것을 한다면 그저 취미로 간직하는 것이 낫다. 절대 그것으로 최고가 될 수 없다. 최고가 되는 사람은 그 지루함과 똥 덩어리에 굴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무소의 뿔처럼 전진하는 사람들이다.
신수정 <일의 격> p.37
ouch,
감정과 기분에 따라, 더 나아가 컨디션이 좋을 때만 하려면 취미로만 하는 게 낫다는 말이 공감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취미 부자라는 말을 더 이상 긍정적으로만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여서도 안되지만, 지루함을 즐거움으로 승화하는 방법을 분명 고민할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