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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케 Sep 02. 2022

그렇게 착하지도 않으면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삽시다


사회 초년생 시절엔 야근을  많이 했었다. 클라이언트의 일정에 맞춰야 하는 업무 특성 때문에도 그랬고, 쪼렙 신입인  실력이 부족해서도 그랬다. 다행히  회사엔 야근러들을 위한 복지들이  가지 있었다. (야근 장려야 뭐야.) 빠듯하게나마 저녁값을 지원해 주고, 일정 시간이 넘어갈 때까지  하면 집까지 가는 택시비도 지원해 주거나 하는 것들. 가장 중요한 야근비 따윈 얄짤 없었지만, 헛똑똑이 신입인 나는 그런  모르겠고 그저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자신에 흠뻑 취해 있을 뿐이었다. ‘ .  완전 커리어 우먼 같네.’



그렇게 덧없는 성취감에 취하는 기쁨도 잠시, 밤 10시까지 정신없이 일하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갈 때면 정말이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일하던 역삼역은 나 같은 야근러들이 많아 택시 경쟁도 치열했다. 힘겹게 택시를 잡아 중계동이요- 하고 말 한 뒤에는 그저 가만히 쉬고 싶은데, 꼭 그런 날일수록 기사님들은 내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온다. “직장인이에요? 이제 퇴근하는 거예요?”



언뜻 들으면 그저 걱정해 주는 말씀이지만, 이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질문에 싹싹하게 대답하는 순간부터 나는 집까지 가는 내내 대화 지옥에 갇히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면 기사님의 삼성 다니는 며느리와 변호사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힘없이 맞장구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발적 감정노동을 한참 하다가, 택시에서 내리곤 스스로에게 물었다.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되잖아. 쉬면서 가고 싶다고 하면 되잖아. 그 말을 왜 못 하니? 기사님이 잠깐 무안하거나 조금 기분 나빠하는 게 불편해도 견딜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착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 나는 착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증거는 지금 당장도 100개 넘게 댈 수 있다.) 아니, 저렇게 싫은 얘기를 그저 듣기만 하는 게 착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용기가 없어 낯선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쩔쩔맬 뿐. 내가 조금 참으면 이 사람도 눈치껏 그만하겠지를 소심하고 수동적으로 기대할 뿐.



내가 생각을 고쳐먹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예삐라는 친구에서 시작된다. (실명이면 정말 재밌겠지만 실명은 아니다.) 별명만큼 얼굴도 예쁜 예삐는 남자 친구들에겐 방금 갈아둔 장미칼같이 굴었지만, 나를 비롯한 친한 친구들에겐 한없이 관대했다. 개그 만능주의인 학창 시절, 웃기려는 욕심에 살짝 선을 넘는 농담을 해도 허허, 같이 놀다가 자기가 돈을 좀 더 내게 되어도 허허, 듣는 사람 생각은 안 하고 내 얘기만 한참 늘어놓아도 그저 허허. 얼굴도 마음도 천사 같은 예삐.



그러던 어느 날 예삐가 나에게 전화로 “나 정말 너한테 섭섭하다.”라는 말로 시작해 분노와 서운함을 토로했던 적이 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정말로)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내가 또 천사 같은 예삐의 한없는 관대함을 기대하고 어떤 실수를 했던 것 정도만 기억난다. 나는 예삐의 분노를 마주하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예삐는 뭐든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예삐의 기준에서 어떤 부분은 괜찮지만, 안 괜찮은 어떤 부분도 당연히 있었다. 나는 안 괜찮은 부분을 건드렸고, 예삐는 그것에 대해 서운하다고 명확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고, 예삐는 대인배스럽게 내 사과를 받아주었다. 예삐는 여전히 천사 같지만, 그날 이후 나는 예삐를 대할 때 어떤 선을 지키게 되었다. 뭐랄까. 훈련을 통한 사회적 반사신경이 형성되었달까. 누구든 어떤 부분은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 경험은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꽤 멋지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좋고 싫은 것은 상대방에게 말해야 안다는 간단한 이치를 몸으로 깨우쳤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이후 투머치토커 택시기사님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형성되어 상황이 개선되었고(땡스 투 타다), 나도 전처럼 택시를 탈 일이 없어 택시에서 그런 말씀을 드릴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 교훈은 의외로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엄마를 만나는 날. 엄마는 항상 나에게 할 얘기가 많다. 티비 뉴스에 나온 대통령 이야기를 봤냐는 것부터 아빠와 얼마 전 있었던 짜증 나는 일까지. 좋은 얘기도 한참 하면 힘든 판에, 한번 하소연이 시작되면 어느 시점부턴 나조차도 괴롭다. 예전엔 ‘조금만 더 참자’,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얘기 들어주나’라는 마음으로 그저 꾹 참고 들었다. 그러다 스트레스 수치가 105%에 육박해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쯤 “근데 그게 중요한 얘기야?”라며 주제 자체에 시비를 걸거나, “아이고 그만 좀 해!”라고 짜증을 내 버리는, 엄마와 나 둘 다 속상한 결론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듣다가, 스트레스 수치 50%쯤, 나까지 힘들어지기 직전에 이 카드를 담백하게 꺼낸다. “어허- 엄마, 오늘 딸 하소연 들어주기 한계치 초과하려고 한다. 더 하면 딸도 같이 스트레스 받겄어. 이 얘기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럼 엄마도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이성적으로 말한다. “아, 나 또 너무 오바했어? 오키오키. 그만할게. 그럼 이 얘기 들어봐봐.” 아, 얼마나 평화로운지.



스트레스 받지 말자. 맘고생 그만 하자 우리. 그렇게 착하지도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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