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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케 Oct 27. 2022

장녀는 어디에 기댈 수 있을까

어떨 땐 너무 무거운 장녀의 무게

"다혜야. 아빤데..." 어느 날 저녁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는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내게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냉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아빠가 하는 얘기를 조금 들어 보니 딱히 용건은 없는 것 같았고, 그저 얼큰하게 술에 취해 계셨다.


아빠는 술에 약하면서 술자리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부터, 어디든 술자리에서 기분이 좋으면 본인의 한도를 넘는 만큼의 과한 술을 마셔서 엄마를 걱정시키곤 했다. 매번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낸 덕에 퇴직 이후에는 술자리를 현저히 줄인듯 했지만, 아직도 가끔 엄마를 화나게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날이 오늘이었나 보다. 


"다혜야. 아빠는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66세) 어차피 살 날이 많이 안 남았다고 생각해. 요즘 몸도 여기저기가 아프기도 하고..." 

"엥? 어디가 아픈데." 

"모르겠어 그냥 여기저기가 아프고... 쑤시고... 아빠도 나이가 있다 보니까. 이제 할아버지 나이잖아."

"살 날 얼마나 남은지는 하늘밖에 모르지 뭐. 등산 열심히 하고 건강 관리하면 되지."

"아빠는 이제 사는 거에 크게 미련도 없고..."


나는 아빠의 술주정에 최대한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과하게 걱정하지도 않고, 과하게 달래주지도 않고, 과하게 부정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조금만 더 아빠를 달랬다가는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 아빠. 아무튼 알겠고. 조심해서 집에 가. 엄마 걱정시키지 말고."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나는 혼자 소리내서 울었다. 아빠가 정말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무엇보다 아빠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 그저 무서웠다. 나는 아빠가 없는 세상을 정말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아빠는 아빠가 없는 세상이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얘길 해서 그랬는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상의하고 싶었다. 아빠가 이런 얘길 했는데 너무 무섭다고. 맨 처음에 남편을 떠올렸지만, 어리광같이 느껴질까봐 머뭇거렸다. 그리고 내 마음에 대해 100%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와 부모님 사이의 일을 남편에게까지 함께 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아빠와 그저 그런 냉랭한 관계지만 적어도 그런 말을 들어서 힘들었을 내 마음은 150% 이해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말들을 한 아빠에게 화를 낼 것 같았다. 그 다음엔 남동생을 떠올렸다. 아직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쁜 남동생에게 마음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나도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 날의 이야기를 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 때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놨다. 


엄마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 그거 신경쓰지 마. 너네 아빠 원래 술 먹고 서러우면 그런 말 자주 해. 젊을 때 부터 그랬어. 엄마도 신혼 때에는 그런 말 듣고 너네 아빠 진짜 어디 아픈 줄 알고 전전긍긍 했거든? 근데 그냥 술주정이었어. 그 날 대략 언제인지 알겠는데 술 엄청 먹고 술주정 한 거야, 그 때도. 내가 안 들어줄 것 같으니 딸한테 전화했구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 얘길 듣고 내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실제로 아빠는 건강했다.) 


하지만 첫째라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 게 아쉬운 것은 여전하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겸허하게 마음을 컨트롤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지만, 아직은 영 멀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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