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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케 Oct 27. 2022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불행일까 행운일까

하드 어딘가에서 디카로 찍었던 오래된 사진을 한 가득 발견했다. 이제 사진을 인화하지 않고 디지털 파일로 보관하다 보니, 당장 눈에 안 띄어도 어디에 있겠거니... 하고 잊어버리고 산다. 가끔 우연히 이런 파일을 발견하면 신이 나서 엄마아빠를 만나러 갈 때 챙겨가곤 한다. 


사진을 보다 보니 엄마나 아빠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썰면서 찍은 사진이 심심할만 하면 하나씩 튀어나왔다. 칙칙한 옛날 벽지 배경에, 가족 모두 꾸미지도 않고 목 늘어난 티를 입고서는, 아마도 동네 빵집에서 샀을 케이크만 생일 구색을 맞춘 사진이지만 나름 정감가는 모습이다. 가족 이벤트를 참 못 챙기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치 못한 사진들이 나오니 신기했다. (진짜 기억은 쉽게 휘발되고, 남는 건 사진 뿐인가 보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했다. "내가 불효녀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챙긴 걸 보니 그래도 그렇게 나쁜 딸은 아니었나봐." 30% 농담이고, 70% 진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엄마아빠는 둘 다 눈이 동그래져서 말씀하셨다. "다혜가 언제 나쁜 딸이었어? 다혜처럼 엄마아빠 속 안썩인 딸이 어딨어."


다들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엉뚱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어떤 기억이 뚜렷하게 떠오르곤 한다. 대부분은 내가 누군가에게 실수했거나, 무례했거나, 잘못해서 스스로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게다가 30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니 많은 기억이 부모님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기억들은 상대도 기억할 정도로 거대하지만, 또 어떤 기억들은 사소한 듯 해도 상대방의 난감한 표정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나서 오히려 더 괴로운 그런 종류의 기억이다. 


중학생 때였을까. 한참 비싼 화장품에 대해 환상이 있었던 어린 시절. 엄마에게 뭐 사 달라고 안 할 테니 동네에 있는 백화점에 구경만 가자고 졸랐다. (당시 우리집은 백화점에서 뭘 사 본적도 없었고, 살 형편도 안 됐다. 게다가 중학생이 무슨 백화점 화장품?) 1층에 있는 화장품 매장에서 립글로즈를 구경하다가, 점원 언니가 테스터를 발라줬다. 그 언니는 친절한 듯 하지만 은근히 무심한 말투에 입꼬리만 웃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초라했을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괜시리 들었다. "구입하시겠어요?" 어린 마음에 자존심이 상했던 나는, 점원이 들으란 듯 엄마에게 "나 이거 살래."했다. 그 때 엄마 얼굴에 떠오른 난감한 표정이란...


결국 엄마는 그 립글로즈를 사 줬다. 차라리 안 사줬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나보다 30살은 많은 엄마도 안 발라본 비싼 립글로즈. 비싼 돈 주고 산 만큼 뽕이나 뽑았으면 몰라. 나는 그 립글로즈를 몇 번 바르지도 않았다. 한 번 보고 말 사람 때문에 내 자존심과 엄마의 자존심을 바꿔버렸던 그 철없는 순간. 나는 엄마의 그 난감한 표정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난다.  


뭘 이런 걸로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하실 수도 있지만, 이건 내가 공개할 수 있는 그나마 무난한 기억일 뿐. 진짜 못 된 것들은 창피해서 공개도 못 하겠다. 내가 했던 어떤 말은 아빠의 마음에 비수가 됐고, 엄마의 마음을 날카롭게 긁어놨다. 그런 크고 작은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저 죄송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준 부모의 사랑은 대체 뭘까? 사죄하는 마음으로 나훈아 콘서트를 예매하고, 아빠의 주말농장에 찾아간다. 


이런 얘길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그랬다. "네가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그래." 그 좋은 기억력으로 잘못했던 기억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대신, 행복했던 기억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 주어진 이 능력이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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