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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케 Sep 01. 2022

부모님을 존경하냐고 물으신다면

네...니오..?


누군가 내게 부모님을 존경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삶을 좋아하지만 존경까진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또 그 반대 감정은 아니고. 어떻게 설명할지 당황하다가 “존경?까진 아닌데 어.. 존경보단 존중?사랑?이랄까?”라며 주현영 기자에 빙의되지 않을까.



부모님을 무려 ‘존경’한다고 세상에 말하려면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단하고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철학적이어도, 세속적이어도 상관없다. 뭐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겠다. “저희 아버지는 사람의 생명을 고치는 의사입니다. 가끔 공부하다가 수학 문제 물어보면 선생님보다도 더 잘 풀어 주세요.”, “저희 어머니는 악착같이 재테크에 매달려 저희 집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어릴 땐 달동네 살았는데 지금은 잠실 살아요.”, “저희 어머니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을 청소하십니다. 본인만의 루틴을 30년째 이어오고 계신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우리 부모님 얘길 해 볼까. 두 분 모두 젊은 나이에 저 멀리 남쪽 시골에서 돈 한 푼 없이 상경했다. 아빠는 등록금이 없어 합격한 교대에 가지 못하고 고졸이 되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시 공부를 몇 년 하다가 내가 태어나던 해에 모든 공부를 청산하고 취직을 했다. 그리고 정년퇴직 전까지 한 회사에서 30년 동안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했다. 아빠는 자식인 우리가 크는 동안 나름 다정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언제나 무뚝뚝했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내가 크는 내내 전업주부였다. 결혼 전에는 미싱 공장에 다니며 함께 상경한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고, 나를 임신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뒀다고 했다. 내가 크면서 본 엄마는 어딘가 무기력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매일 가족의 끼니를 충실히 챙겨 주셨지만, 엄마의 음식들은 가끔 얻어다 먹는 이모 반찬보다 맛이 없었다. 우리가 좀 자란 후에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도 관심을 가지셨지만 집안을 일으킬만한 큰 성공은 없었다.



가끔 가족들에게 이모랑 같이 맥주집을 해 보겠다거나, 식당을 해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엄마의 소심한 성격을 생각하며 매번 극구 말렸다. “그런가...?”하고 결심과 포기를 반복하던 엄마는, 내가 대학생이 됐을 때쯤 온 가족의 반대를 뿌리치고 마트 알바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종종 마트 알바를 하신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존경하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엄마 아빠의 애정 담긴 이야기도 대부분 흘려들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의 여가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근무 형태 직무에 입사 원서를 넣어보라는 제안이나, 펀드를 정기적으로 들어보라는 엄마의 재테크 조언 같은 것들. 물론 내가 워낙 청개구리처럼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성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아빠의 회사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던가, 엄마의 재테크 능력이 믿음이 가지 않는다던가.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 엄마 아빠의 조언들은 논리적이었고, 맞는 말이었고, 그대로 했으면 내 인생이 더 편해졌을 가능성이 커서 속이 쓰리긴 하다. 쩝.



하지만 그 말들이 옳았던 이유는 엄마 아빠가 존경받을 만큼 똑똑해서라기 보다는 나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살았고, 진심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고심해 뱉은 조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삶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나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그 누구보다도 압도적이라는 면에서 내겐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그 특별한 마음이 새삼스레 고마웠다.



그걸 깨닫고 나니 엄마와 아빠의 삶이 조금씩 달리 보였다. 마치 방금 닦은 안경으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상경해 동생들을 위해 고된 미싱 공장에 다녔던 복희씨가 짠했고, 지루한 전업주부 생활  무기력을 떨치고 용기를  늦은 나이에 일을 시작한 복희씨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복희씨를  미리 믿고 응원해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한편 한평생 회사원이었던 수용씨의 삶은, 어떤 부분에선 참 외로웠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수용씨에게 나 같은 누나가 있었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입학금만은 대 줬을 것이고, 그랬다면 수용씨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막연히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수용 씨는 그저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서툰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분들이 내 시행착오를 한평생 안아주었듯, 이젠 내가 그들이 또 할 수도 있을 삶의 시행착오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 박사 학위를 딴 사람이 말하는 똑똑한 말은 아닐지언정,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뱉게 되는 애정 깊은 조언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엄마와 아빠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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