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게 싫어 아기랑 떠났던 발리, 지금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몇 년을 비워둔 것 같은 빈 집의 문을 열었다.
꽤 오래 비워둔 집의 문을 열기까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곰팡이가 슬진 않았을까,
가구가 망가지진 않았을까,
쌓인 먼지는 언제 다 털고 치울까.
발리에 다녀온 지 언 2년이 다 되어 가고, 마지막 글을 적은 지는 1년 반 정도가 훌쩍 지났다.
마지막 글을 적었던 게 아마 다시 일을 시작할 때 즈음이다.
흘러가게 내버려두면 잊히기 마련인 게 사람 일이다.
누군가는 금수저를 못 물었으면 내가 미디어가 되라고 하고, 누군가는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라고 한다. 그래요 좋죠. 다. 근데 시간이 없어요. 핑계같고, 나태해보일 수 있는데요, 정말 애 씻기고 재우고 나면 11시고 그럼 넉다운인걸요.
아무튼 요즘 같은 세상에 나는 남의 컨텐츠만 만들 줄 알았지 정작 내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2년을 보내 버렸네 싶어, 오늘은 넷플릭스를 보는 대신 브런치를 틀었다.
아무리 기운이 없더라도 잊혀지기 싫었던 그 때의 감정을 꾸역꾸역 상기시키며, 요 근래 들었던 무수한 생각들이 또 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2년 전 발리로 떠나기 전 썼던 첫 글.
[관련글] 프롤로그:: 발리에서 한 달 살기
시간이 지나고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저 때의 나는 육아로 고립된 상황을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어 어금니를 꽉 깨문 애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임신으로 일을 쉬던 그 때 비슷한 연차와 나잇대의 친구들은 이제 좋은 직장으로 점프도 하고, 연봉도 뛰었던 때였으니까.
2018년의 내 생각을 지금은 한두 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땐 사실 너무 복잡해서 못했는데.
'죽일 놈의 장녀 컴플렉스 때문에 결혼도 일찍하고, 남들이 얘기하는 안정적인 상황이 빨리 찾아왔잖아. 근데 나는 왜 초조하고 불행하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게 아기와 발리 한 달 살기였고,
최소한 그 당시 최연소 아기를 데리고 발리로 한 달 살기를 다녀온 사람으로 기록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남들이 안 해본 거 해야지. 그렇게라도 내 기록을 남겨 둬야지
그게 그 당시 내 마음이었다.
그 땐 이렇게라도 떠나지 않으면 넘치는 관종끼를 주체 못하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관련글] 아일 낳고나면 살짝 미쳐있잖아
아니 근데, 2년이 지나고 보니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뀐거라.
그 때 잘나갔던 친구들이 이제 경력단절을 두려워 함
그 때 잘나갔던 친구들이 다시 연락을 해 옴
그 때 잘나갔던 친구들이 현 시국으로 인해 직장 생활이 불투명해짐
그 때 잘나갔던 친구들이 결혼으로 얻는 안정감을 부러워 함
그 때 잘나갔던 친구들이 빨리 애를 낳은 나를 부러워 함
뚜껑 까보면 그 친구나 나나 거기서 거기겠지만, 역시 사람 사는 건 장거리 레이스라고 누가 먼저 빨리 간다고 1등하는 것도 아니고, 좀 느리다고 꼴등 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인생을 레이스로 표현하는 것도 좀 웃기다만. 제가 표현력이 아직 좀 부족해서요.
발리에 다녀온 후, 나는 사회와 섞이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결론이 섰고, 육아보다는 내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을 보길 몇 차례 반복하며 고마운 회사를 만났고, 그 회사에서 몸이 기억하는 일을 다시 상기시킨 다음 지금의 회사로 왔다.
그 땐 말의 갯수도,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와 내가 이런 단어를 안다고?' 싶을 정도로 말도 잘함.
[관련글] 말의 갯수
나는 지금 말의 정점을 달리는 업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다.
한 회사의 소통 창구이자, 입이자, 귀가 되는 건 어렵고도, 무겁지만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청자(타겟)에 맞는 컨셉과 용어를 써가며 컨텐츠를 만들고, 피칭하고, 배포하다 보면 엄마가 부캐같고 회사의 직함이 본캐가 되는 희열도 느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홍보, PR바닥에서 구를 땐 지긋지긋했는데 지금은 있고 싶었던 업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건 얼마나 다행인건지.
일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적기로 하고.
몇 일 전, 뱅지를 만났다.
뱅지는 나와 함께 첫 직장에서 밤 12시까지 신영빌딩 2층을 환하게 밝혔던 (구)동료, (현)친구다. 뱅지는 당시 업의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어엿한 회사를 차렸고 나는 친구가 퇴사하고 한 2년 정도를 더 일하다가 스타트업으로 적을 옮겼다.
회사를 박차고 나간 뱅지는 몇 가지 사업이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지며 지금 인생 욜로하며 살고 있고, 나는 당시 초기 멤버로 함께 조인하자는 제안에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일복이 터졌다.
와, 그 때 갔으면 지금 이 고생 안해도 됐잖아. 참 돌고돌아 힘들게 산다 나라는 애.
아무튼 최근 한 공유오피스에서 점심시간을 쪼개 어렵게 만나, 샐러드를 먹으며 근황을 공유했다.
많은 주제를 공유하며 얘길 나눴고, 나는 바쁘고 정신없고 '열심히가 아니라 잘하고 싶다, 그래서 힘들다'고 말했을 때 뱅지가 그랬다.
야, 근데 웃기지 않냐? 너 그 때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어
그러게. 그 때 왜 그렇게 잊혀질까 무섭고, 일이 없을까 두렵다고 했을까.
그 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어도 지금 일복은 차고 넘친다
사람 사는 거 길게 봐야 한다.
그리고 나는 감정이 쌓이면 글을 쓴다(?)
잊혀지는 게 두려웠던 그 때의 감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느끼는 이 버거움은 호사다.
비록 온라인 인터뷰 중에 아이가 난입해 "엄마 미워!"를 외치며 대성통곡을 했을지라도,
친정엄마가 일주일 만에 "어휴 이모님 구해라" 라고 한 소리 했을지라도,
결국 마치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밤 11시가 넘어 노트북을 켰을지라도!
누군가 날 찾아주고 함께하길 원하는 지금을 감사히 여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