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굴러가는하루 Mar 22. 2024

달리기는 직장 생활이 아니야

30대 백수의 러닝 기록(6) : 성과와 성장에 집착하지 말 것

3년 반 다닌 회사에서 퇴사한 후 이직 대신 달리기를 시작했다. 남들은 일과 삶에서 자리 잡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을 30대 초반, 이직을 미루고 커리어 공백을 갖는 게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곧장 새 조직에서 일을 하기에 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나다움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에 커리어를 일시 정지시켰다.


그러던 중 달리기를 만났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백수 생활에 달리기는 상상 이상의 활력을 주었다. 목표한 대로 끝까지 달렸다는 성취감, 스스로 건강을 챙긴다는 뿌듯함, 비루하긴 해도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자랑스러움은 물론, 달리기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꾸준히 쓰게 된 것 역시 뜻밖의 이득이었다. 그렇지만 달리기가 늘 좋은 것만 주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주로 달리기의 장점을 언급했지만, 사실 아주 깊고 진한 절망이 몰려오는 순간도 있다. 바로 성장이 없다고 느껴질 때다.


달리기를 꾸준히 하게 된 계기는 '어제보다 성장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3km를 뛰는 데도 죽을 듯 헉헉거렸는데 어느 순간 3.5km를 돌파하고, 이제 4km 정도는 가뿐하게 달리는 내가 기특했다. 체력도 확실히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달리기는 노력하는 만큼 느는 운동이구나!' 그렇지만 이런 명쾌하고 즉각적인 성장의 맛이 쭉 이어지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기가 왔다. 아무리 힘을 내 달려도 몇 주째 5km의 벽이 깨지질 않았다. 4km대 후반까지는 어찌어찌 달리겠는데 그 이상은 체력이 부쳐 나아갈 수가 없었다. 모래주머니라도 단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더는 못 뛰겠다'라는 마음의 소리는 신경질이 되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런 나를 누군가 지켜봤다면 얼마나 웃겼을까. 힘들어서 시뻘게진 얼굴에 죽을 것 같은 표정, 입에는 알 수 없는 분노의 중얼거림을 반복하는 여자. 보기엔 우스꽝스럽겠지만 난 속상했다. 마음은 5km고 10km고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은데 현실은 정반대였으니까. 사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보다 몇 주째 발전하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어제보다 성장한 나는 무슨. 달리기 실력이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전히 아쉬운 기록으로 달리기를 마쳤던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나름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데 왜 나아지지 않지? 밥을 덜 먹어서 힘이 없었나?' '정체기가 있을 수 있지. 근데 그게 몇 주씩이나 갈 일인가?' '이리저리 검색해보면 한 달 만에 벌써 5km를 돌파했다는 러너들도 수두룩한데... 나는 왜?' 머리가 아팠다. 성장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 달리기도 투자한 대로 성과가 바로바로 나오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해봐도 괜찮지 않았다. 대체 왜 성장하지 않는 거냐고!


사실 성장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건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난 모든 면에서 느렸다. 공부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심지어 게임 규칙을 숙지할 때도 남들보다 오래 걸렸다. 그런 내가 답답하고 싫었다. 이런 기분은 직장을 다닐 때 제일 많이 느꼈다. 직장에서는 거의 모든 일에 데드라인이 있다. 오롯하게 나의 속도로만 살 수는 없다. 원래 낼 수 있는 속도보다 더 숨 가쁘게 살아야만 문제없이 회사 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힘들었고, 금방 지쳤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직장의 상황과 나에 대한 실망과 원망, 에너지의 부침이 하루하루 쌓여갔고 결국 퇴사를 택했다. 성장이 더디고 성과를 내는 데 오래 걸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달리기 실력도 잘 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기는 직장생활이 아닌데. 달리기에는 데드라인도 없고, 내 기록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어려운 상사도 없다. 그냥 나에게 맞는 속도로 뛸 수 있는 만큼만 뛰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난 왜 그렇게까지 성과와 성장에 의무감을 느끼며 집착했을까? 어쩌면 난 퇴사를 한 지금까지도 시원찮은 성과와 더딘 성장에 스트레스받던 직장인 시절에 갇혀 었는지 모르겠다. 직장생활에서 맛보지 못했던 뚜렷한 결실과 성취감을 달리기를 통해 얻어내고 싶었던 같기도 하다.


이제 달리기를 맨 처음 시작하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때의 나는 기록이야 어떻든 개의치 않고 끝까지 해낸 것 자체가 성공라고 스스로 무한한 응원을 쏟아부었다. 그거면 된다. 지금 나는 백수고 자유롭다. 직장도 없고 일도 없고 누군가에게 나의 잘남을 증명해야 할 의무도 없다. 늘면 느는 대로 늘지 않으면 늘지 않는 대로, 달리기가 주는 기쁨을 다시 한번 오롯이 만끽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