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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방백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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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Feb 10. 2018

호우주의보


알람이 울렸다. 호우주의보였다. 언뜻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밖은 흐렸고 나는 계속 누워서 뒤척였다.
7월의 마지막 주, 두 달여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그 회사의 사장은 주위 사람을 깎아내리며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회의라도 할 때면 늘 두 시간씩 붙잡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입사하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수들이 그만뒀다. 사장은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는 불안감과 책임감에 매일 야근을 했다.
그렇게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출근을 걱정한 지 두 달쯤 되던 날, 그만두겠다는 결심으로 면담을 신청했다.


"너 여기서 나가면 어딜 가도 안 될 거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애 아니잖아. 이것도 못 견디면 뭘 할 수 있겠니?"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회의실에 앉아 대화를 했다. 분명 네시에 들어왔는데 어느덧 시계는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말의 나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금수저도 아니고 네가 대기업에서 임원급 정도 되려고 했으면 태생이 달랐어야 했어. 난 네가 좀 버텨서 더 해봤으면 좋겠다. 너 솔직히 1년 차 치고 엄청 잘 하는 거 아닌 거 알지? 나 처음에 시작할 땐 너보다 더 못 했어. 근데 지금 사장하잖아. 하면 되더라니까? 3년쯤 하면 다른 회사 애들 5년 차만큼 할 수 있게 내가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는 '솔직하게'라는 말을 자주 썼다. '솔직하게'를 붙이면 막말도 진심이 되는 걸까. 나는 솔직한 사람이니 괜찮다는 면죄부라도 얻는 걸까.
몸이 떨렸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견딜 수가 없어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 사이로 타이밍을 잡을 새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난 말이야, 열정이 없는 애들이랑은 한시도 같이 있기가 싫더라고."

'여기서 그만둔다고 해야 해'

"사장님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저는 안 되겠어요. 도저히 못 할 것 같습니다."


자존감을 갉아먹는 상사 밑에서 누가 열정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야근은 견딜 수 있어도 감정 폭력은 견딜 수 없었다. 돈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회사를 그만뒀다.



잠깐 깨었다가 다시 자기를 반복하다 치과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뒤척이던 때와 달리 섬광 같은 속도였다.
비가 멈춘 듯해서 우산을 두고 나왔는데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돌아가서 우산을 가져올 정도는 아니었다.



"전화 한 통화만 하고 오셨으면 더 빨리 처리해드리는 건데."


간호사가 진료과를 옮겨 다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예약도 안 하고 온 나를 예약자 명단에 끼워 넣어주었다. 덕분에 두 시간 만에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 안 모두가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안내하고 설명을 한다. 영혼 없는 친절 인가해서 표정을 살펴봐도 알 수 없다. 염증이 어쩌고, 수술이 어쩌고 의사와 간호사가 오가며 설명을 해주는데 도통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깨끗하고 무해한 공간, 이곳 사람들은 기분이 나쁠 때에도 친절할까. 그럴 때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 한정된 공간의 특수성이 친절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까? 아니, 사적인 감정이 공적인 일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지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료실 밖에서는 저마다 불안과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가만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조금 더 있으면 그칠 것 같다가도 쉬이 그치지 않고, 여기는 내리지만 저쯤 가면 멈출 듯이. 무지막지하게 내리지는 않는데 우산 없이 가다가는 젖을 법하게 애매한 속도로.


버스를 타고 카페 근처에 내렸다. 손에 든 진단서로 비를 가리고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곧장 건너 카페로 들어갔다.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도 못 먹었는데 뭘 먹긴 해야겠고, 메뉴를 한참 고르다가 베이글과 커피를 시켰다. 커피가 나오고 한참 뒤에 베이글이 나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봤다.


'너 여기 나가면 어딜 가서도 못해.'


절대 여기가 끝이 아닌 걸 아는데 자꾸 맴도는 말.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도, 좀 더 견딜 걸 그랬나 하고 돌아보게 됐다. 자꾸만 작아졌다.
'괜찮아, 내가 나를 믿으면 돼.' 하고 되뇌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우산을 접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새 비가 그쳤나. 아닌가, 아직 오는 거 같은데.'


자세히 보니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 사이로 후드득 빗물이 떨어졌다. 바람이 멎으면 비도 함께 멎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두어 방울 떨어트릴 뿐이었다. 나무도 아직 비를 다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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