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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방백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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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Feb 13. 2018

너무 사소하고 거대한

꿈을 꿨다. 소개팅을 했는데 왠지 어색한 머리를 한 남자가 나왔다. 내가 "그건 가발인가요" 하고 물었고 남자는 가발을 벗었다. 남자의 본래 머리는 멀쩡했다. 그는 가발을 쓰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며 우울과 강박이 있지만 괜찮아지고 있다고, 나아지는 중이라고도 했다.


나는 내 옆에 앉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아프신 분이구나." 하고 말했던 듯하다. 그가 그걸 들었는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지고 있다 하지 않았냐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아프다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채로 계속 꿈이 흘러서 도망치듯 계산을 하러 나왔다. 하지만 그는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화를 냈다. 마치 결핍이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제발 꿈이었으면 하던 그 순간 꿈에서 깼다.


눈을 떴는데도 너무 생생해서 현실도 꿈결처럼 느껴졌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에도 자꾸 생각이 났다. 꿈의 영상은 흐릿한 채로 감정만 남아서 '무슨 이런 꿈이 다 있지.' 하며 한동안 얼얼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한 가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살이라고 했다. 아니 왜?라는 의문과 함께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그다지 좋아하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가 만든 노래로 한 계절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 한 곡을 듣고 또 들으며 울고 웃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니 더 잘 살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아니었나 보다. 모두에게 알려진 사람이지만 모두 그를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간극과 지독한 우울. 공개된 유서의 모든 문장에서 마음이 아렸지만 유독 한 구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힘든데 그걸로는 이만큼 힘들면 안 되는 거냐고, 사연이 있어야 하는 거냐고, 혹시 흘려들은 건 아니냐 하던.

누군가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사소하고, 나에게는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나도 종종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차오르면 어찌할 바를 몰라 참곤 했다. 응축된 우울을 끌어안은 또 다른 나는 어딜 가서 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지냈다. 그중에는 정말 괜찮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그저 웃었다. 누구도 낮에 환하게 웃는 내가 밤에는 누워서 매일 죽음을 떠올린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평소와 같았다. 아니, 노력했다. 분장이 지워지면 표정을 잃는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는 아주 가끔 죽음을 말했고, 농담처럼 흘려보냈다.

나의 우울에 거창한 이유는 없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로 시작한다. 너무 사소하고, 거대한. 나는 내 안에 잔뜩 고여있던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우울의 심연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리다 이제 겨우 물 위를 노닐 수 있게 됐다. 헤어 나올 수 없고, 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때로 감정을 숨기더라도, 나까지 속이는 일은 없다. 곧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나의 민낯을 마주하고, 나의 사소함에 귀 기울이고, 하나의 글을 쓰고, 하나의 이야기를 비워낸다.
'괜찮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아. 이제 그마저 괜찮아.'

내 꿈의 소개팅 남은 혹시 나였을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이며 심연의 시간을 지나온 나였을까. 내가 스친 어느 누군가 혹은 당신 혹은 우리 모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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