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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mei mi Sep 09. 2020

5. 천계영- 장인의 결

청바지 원단의 짜임 - 인생의 길과 닮은 결의 방향 



<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





끝이 뾰족한 금속 펜촉에 검은 잉크를 찍어서 스케치가 되어 있는 종이에 만화를 습작했던 중학생 시절.내 마음속 즐거움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한 만화에 대한 기억은, 원고용지를 자유롭게 노닐었던 펜촉의 사각 거림이 준 유쾌한 리듬이다. 내게 만화가의 꿈을 심어준 것은 '순정만화'를 접하게 되면서였다. 등학생  맹장 수술로 입원 한 병실에서 만난  고등학생 언니를 통해 '윙크'라는 잡지를 알게 었다.그날이 나를 순정만화의 우주로 초대했다.



윙크는 매월 발간되는 순정만화 전문 잡지다. 강경옥, 신일숙, 황미나 등의 기라성 같은 거장의 작품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모전을 통해 신인 만화가의 데뷔가 이뤄지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순정만화 월간지였다. 이 공모전의 계보에  빠질 수 없는 메가톤급 스타작가  천. 계. 영.  그녀는 펜촉에 잉크를 찍어 그리고 다양한 무늬의 스크린 톤을 붙여 효과를 내던 아날로그 만화 제작 방식을 넘어  국내 최초로 포토샵 효과를 작화에 대입한 선구자였다. 데뷔 후 신선한 작화와 독특한 감성이 느껴지는 작품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스크린 톤- 텍스처와 그림자 등의 무늬가 인쇄된 접착 시트 )







<  '언플러그드 보이'의 극 중 고화질 이미지는 천계영 작가님께서 팬들을 위해 직접 인터넷에 올려 주셨다. >



<   이미지 출처- 천계영 작가님 트위터  >








언플러그드 보이.

주먹만 한 얼굴에 모공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게다가 8등신을 가뿐히 넘는 우월한 비율과 훤칠한 키는 소녀들이 흠모하는 아이돌의 이상적인 외모의 집대성이다. 여기에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패션 센스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겸비한 그야말로 남신(男神)의 출현이 이뤄졌다. 모든 게 바로 주인공 '강현겸'을 수식한다. 그의 여자 친구이자 히로인 '채지율' 마저 비현실적인 그의 모습이 마치 날개를 숨긴 천사가 잠시 인간으로 변한 거라고 생각하고, (등이 가려우면 날개가 돋아 나올지 모르니) 자신에게 꼭 말해 달라고  대목은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럽다.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때마침 국내에 힙합과 아이돌 문화가 자리 잡아 큰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 이와 맞물려 완벽한 외모에 힙합 댄스마저 섭렵한 강현겸에게 빠져 들었다. 나를 비롯한 당시 수많은 여학생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제 갓 데뷔한 신인 작가는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받는 스타 만화가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   극중 '재활용 밴드'  맴버 4인방 (좌측부터)  국철, 황보래용, 장달봉, 류미끼 / 이미지출처: 인터넷  >





그 기대가 무거워 자칫 주눅이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화가를  하려면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련을 거치는 게 당연한 관례로 여겨지던 시대, 독학으로 만화를 배우며 공모전을 통해 데뷔한 강단 있는 람이었다. 그녀는 독자들이 보내준 사랑을 에너지로 더 스타일리시하고 탄탄한 구성의 획기적인 로 돌아왔다. 한국 순정만화 역사상 100만 부 판매의 신화를 쓴 '오디션'. 각기 다른 음악 천재성을 가진 4명의 청년들이 우여곡절 끝에 만나 팀을 이루고 밴드로서, 더불어 각각의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오디션 열풍이었고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연이어 히트작을 내고 두 번째 작품은 대한민국이 들썩일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화려함의 정점에 있을 때  그녀는 '오디션'의 연재 종료 후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몇 년 후 다시 복귀해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왔지만, 나중에 인터뷰와 방송을 통해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그 당시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 번 연재에 들어가면 주 7일 하루 16시간에 이르는 고강도의 작업은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하여 세상과 차단된 외로운 생활의 나날이다. 심신이 지쳐 있었고 만화 이외에 일반적인 일상생활을 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도망치듯 간 유학이었지만, 막상 그곳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집필하는 등 창작자로서의 욕구를 다시 재확인 하게 된다.






<  2003년~2005년작   DVD (땀과 비누와 디디의 이야기) - 이미지 출처: 인터넷   >



< 좌:  2007년~2010년작  하이힐을 신은 소녀  /  우: 2009년~2011년작  예쁜 남자 >




<   좌:  2011년작  드레스코드  /  우:  2014년~ ( 휴재 중 )  좋아하면 울리는  >






'DVD', '하이힐을 신은 소녀', '예쁜 남자'로 이어지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 갔고 그림체는 조금 더 날렵하고 화려해졌다. 정보 통신과 컴퓨터 기기의 발달로 어느새  만화는 단행본으로 보기보다 모니터나 모바일 화면에 스크롤을 내려 보는 '웹툰'이 인기를 끌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는 법을 작가에게 대입해 만들어 가는 리얼 만화 '드레스 코드'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연재했다. 정보 전달의 성격이 있는 내용과 웹툰의 형식을 과감히 받아 들여 기존의 그림체에서 탈피해 귀엽고 단순한 새로운 그림을 만들었다. 역대 모든 작품에서 캐릭터들이 입는 옷의 스타일이 화제가 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 있는 패션의 포인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쁜 작업 스케줄에 정작 본인을 위한 옷 한 벌에는 쇼핑할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작품 안에서 보여준 '옷'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는 제의로 이어졌고, 만화를 연재하며 자신이 직접 옷을 입고 어울리는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현실감 있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를 더 사랑하며 아끼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새로운 만화 매체 웹툰에 완벽히 적응했고  '좋아하면 울리는'을 발표하며 또 한 번의 커다란 변신을 보여준다.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시대, '알람(앱)을 통하여 좋아하는 이를 구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라는 시대의 기술과 상상력의 결합! 참신한 아이디어와 웹툰 세대 독자층을 겨냥한 선과 면이 적절히 돋보이는 세련된 또 다른 그림체를 창조하며 아이디어 뱅크의 면모가 건재함을 확인시켰다.







<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




감각적인 스토리와 캐릭터가 큰 인기를 끌었고 성황리에 연재하던 중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2018년 5월 악성 종양 제거 수술과 함께 손가락에 퇴행성 관절염이 문제였다. 극심한 통증으로 더 이상 손으로 만화를 그릴 수 없다고 했다. 새로운 세계를 그려서 창조하는 이에게 손을 쓸 수 없다는 건 창작자로서의 생명에 끝을 의미했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유일하게 힘 조절이 가능한 엄지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마우스를 특수 제작하고, 컴퓨터에 장애인용 음성인식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화 그리기를 이어 간다. 키보드 대신 마이크에 대고 명령어를 말하면  저장된 그림을 조합해 그린다. 이렇게 제작한 '좋아하면 울리는'163회는 6개월간의 각고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긍정적인 모습은 타인을 위한 배려와 같이했다.트위터와 유튜브를 통해 음성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공개. 홀로 걷고 있는 길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나눠 주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천계영 작가님 트위터  >








부드러운 목화솜에서 만들어진 면사는 가로와 세로 방향을 교차해서 청바지를 제작하는 데님 원단을 만든다. 경사와 위사가 조합되면서 만들어지는 사선의 능(綾). 짜임의 방향에 따라 좌능과 우능으로 구별된다. 이렇게 직조된 원단에서 느껴지는 '결'은  옷을 만들기 전 디자인을 할 때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에게도 결이 있다. 천계영 작가에게는 일을 함에 있어 보이는 '자신만의 결'이 명확한 사람이다. 청바지가 시간이 흐를수록 본연의 멋이 흘러나오는 이유는, 세로 방향의 실에만 염색을 하고  무지의 가로 방향에 흰색 실이 점차 드러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데님만의 오묘한 특성에 있다. 데님이라는 질기고 튼튼한 강도의 옷감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수많은 공정. 그것이 있기에 월의 무게를 담을 수 있다. 오직 만화를 위해 수십 년간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창조해낸 그녀의 작품에 해가 갈수록 더 견고함이 느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되었을 열정과 노력의 숨결 때문이다. 육체의 고통이 신체적 한계를 주어 원활한 작품 활동에 제약을 주었지만, 20년 넘게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장인으로서  저력은 여전히 찬란히 살아있다. 자신의 길을 걸을수록 더 조밀하고 강건해질 결이 만드는  만화가 천계영의 현재는 나날이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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