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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mei mi Oct 19. 2020

7. 백남준- 균형을 갖춘 새로운 틀

청바지의 발명 - 세상에 없던 특별한 것의 탄생




< 사진 이미지 출처- 구글 >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에워싼 대부분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세상이다.사회를 이루기 위해 정해진 규범이 생겨났고, 이 기반 안에서 파생된 문명은 시간의 퇴적을 거치며 다양한 양식을 만들어 냈다. 그중에서도 예술은 인간이 빚어낸 정신문화의 백미다.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 글과 음악, 그림과 조각, 무용 등의 산물은 삶의 창의적인 부분으로서 세상을 환기시키는 계기나 영감을 준다.



'자유롭다'라는 것은 얽매이지 않은 감정을 전달받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나에겐 예술 작품과 마주할 때 다가오는 것 중 하나다. 고전 예술은 각 분야별로 견고한 전통이 있다. 그에 알맞은 전형을 갖춰야 한다. 예를 들어 동양화를 그릴 때 먹의 농담과 붓의 필압 그리고 종이 안의 여백의 미가 어우러지는 밸런스를 기준으로 보게 된다. '동양화는 이래야 돼'라는 생각으로 한 영역의 틀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장르 안에서 생성되는 고정관념이다.하지만 정체성이기도 해서 예술가에게 창작의 고통이라는 고뇌가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일률적인 생각에서 벗어 나는 시도가 이뤄질 때, 철옹성 같은 관념은 그 성질을 바꿔 전혀 다른 것을 탄생시킨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고정되지 않고 흐르는 물결처럼 생각하기를 생활화했던 사람이 있다. 그래서 세상에 없던 장르를 개척한 예술가 백남준. 그는 비디오 아트를 창시했다.






< 1963년 ,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 / 이미지 출처 -구글 >                                



< 자석 TV  (1963년)  / 이미지 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



최초의 비디오 아트는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백남준이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영상물을 13대의 TV를 통해 수신하며 세상에 나왔다. 추후에 비디오 아트는 실사를 촬영한 이미지를 '백- 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새롭게 표현한다. 스캐닝을 비롯해 색상에 변화를 주며 합성하고 편집해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든다. 또한 브라운관 표면에 충격을 주거나 자석으로 전파의 흐름을 왜곡시켜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 정지된 오브제로서 관객의 시야에 머물렀던 예술 작품이 양방향 소통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그래서 정체되지 않고 미래지향적이다. 기존 예술의 완고함을 타파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는 이전에 거쳐온 백남준 예술의 발자취를 통해 응집되고 발현된 실체다. 그는 예술가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스펙트럼이 너무도 방대한 사람이다. 4개 국어(한국어, 독어, 일어. 영어)에 능통했고, 이를 통해 세계의 역사 및 철학과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공부했다. 다양한 분야에 촉각을 곤두세운 면모는 추상적 사고에 논리적 합리성을 더 한 예술을 할 수 있는 토대였다. 예술의 여러 갈래에서도 빼어난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올린 풍부한 경험을 통해 가능 했다.




< (좌측)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우측)  존 케이지 - 둘은 사제지간이다. / 이미지 출처:  구글  >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직물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룩한 부모님의 슬하에서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윤택했다. 일제 강점기라는 국가적 시련 안에서도 기본적인 교육은 물론이고 예술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형과 누나들이 보던 서양의 책과 음악은 장난감보다 더 큰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누나 백영득이 피아노 치는 것을 보며 깊이 빠져 들었고, 유명 피아니스트 신재덕과 작곡가 이건우에게 사사 하였다. 이때 이건우 선생님을 통해 접하게 된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 음주의> 음악은 기존의 조성 음악에서 느끼지 못 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후 홍콩과 도쿄에서 수학하고 도쿄대 졸업 후엔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의 음악적 탐구는 독일에서 존 케이지를 만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미국의 현대 음악가인 존 케이지는 '일상을 이루는 모든 소리가 곧 음악이다'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그가 작곡한 <4분 33초>는 관객과 연주자가 있는 한 공간 안에서 발생되는 모든 소리가 '연주'라고 했다. 연주자의 침묵이 이끌어낸 우연의 음악. 이에 깊은 영감을 받은 백남준은 1960년 <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고 넘어뜨리고 깨부수는 액션 퍼포먼스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61년  <머리를 위한 선> / 자료출처 -구글 >


전위적 움직임은 회화로도 이어졌다. 1961년 <머리를 위한 선>은 잉크를 머리카락과 손에 묻히고 바닥에 있는 종이 위에 옴 몸을 움직여 가며 붓처럼 선을 그렸다. 그의 표현에 대한 거침없는 질주는 마키 우나스와 요셉 보이스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를 계기로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초기 단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 마키 우나스에 의해 창설된 국제적인 전위예술운동이다. 기존 예술 영역의 틀을 넘나드는 시도를 통해 다양한 예술을 폭을 새롭게 확장하는데  일조했다. 뉴욕에 있는 플럭서스 본부를 거점으로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였고, 백남준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 1964년 <로봇-K 456>과 함께 사진을 찍은 백남준과 샬롯 무어맨 >



 < 1967년  <오페라 섹스 트로니크>. 우측 이미지의 '인간 첼로'는 백남준이다. / 이미지 출처- 구글 >                                     



존 케이지와의 만남 이후 전자 음악에 갖게 된 관심과 플럭서스의 영향으로 음악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는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을 선보인다. (훗날 비디오 아트의 시초라 불린다.) 플럭서스 멤버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함께 공연한 < 로봇 k-456 >,< 로봇 오페라>등을 거치며 전자 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다. 특히 1967년 뉴욕에서 공연한 <오페라 섹스 트로니크>는 고전음악에서 터부시 한 성(性)을 주제로 혁명적인 공연을 기획 및 작곡했다. 연주자인 샬롯이 으레 입어야 하는  드레스를 무대에서 벗으며 본격적인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이것은  '외설이냐 예술이냐'의 화두를 던지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공연장에서 샬롯은 음란죄로 연행되어 구금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투쟁과 예술인들의 도움으로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두 사람은 당당히 현대 예술사에 획을 그었다.




<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영상 이미지 / 자료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                                



고전음악으로 시작한 백남준이 전자음악으로 방향을 선회하며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음악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개발된 비디오 기기와 흑백 TV는 그에게 강렬한 끌림을 주었고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초석을 만든 주재료가 되었다. 컬러 TV가 아직 계발되기 전부터 이를 미리 예견 한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물든 TV로 표현할 작품을 위해 전자와 통신의 념을 이해하는데 몰두했다. 




백남준은 역사와 현대 문명 안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였다. 1984년 1월 1일 인공위성으로 뉴욕과 파리 및 한국을 잇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공연하고 생중계 한다. 한마디로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예술가들의 공연을 한데 모은 종합 선물세트. 전 세계 2천5백만 명이 시청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오직 그 만이 생각할 수 있는 무대였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최초의 예술로서  누구보다 먼저 지구촌의 세계화를 실현시켰다. 세계적 호평을 받은 공연은 2년을 주기로 <바이 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 등으로 이어지며 앞으로 인류가 맞이할 시대를 비췄다.



<백남준-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 1974 스미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  >



그는 <전자 초고속도로>라는 작품을 통해 앞으로의 시대는 물리적 거리에 지배되지 않고 기술과 상상력이 결합된 소통의 장이 될 거라 확신했다. 컴퓨터는 손안에 잡히는 스마트폰으로 콤팩트 하고 인터넷으로 언제든 전 세계와 연결된다. 더불어 전자 회화와 전자 카메라의 등장을 말 한 바 있는데, 실제로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했고 현재는 모든 휴대폰에 카메라가 장착되어 언제나 사진을 찍고 자유롭게 데이터를 전송한다. 또한 어도비(Adobe)의 포토샵이나 일러스트와 같은 프로그램의 개발은 전자 이미지를 쉽게 만들어주는 온라인 캔버스의 역할로 전자 회화의 지평을 열었다. 4차 산업 혁명을 맞이한 현시점에서 감탄이 나오는 그의 예견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좌) 서울 스퀘어 미디어 파사드- 줄리안 오피/ 이미지 출처- h 헤럴드경제, (우) 코엑스 웨이브/ 이미지 출처- 현대카드 >


1974년 12월 16일 이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앞으로 비디오 아트가 크게 발전할 것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믿어 의심치 않고 확답했고 또 한 번 그의 직감은 적중했다. 비디오 아트는 새로운 시대와 기술의 도약이라는 옷을 덧입고 미디어 아트를 발전시켰다. 건물 외벽을 스크린으로 이용하여 영상을 상영하는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에 따라 크기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탄력적인 캔버스다. 얼마 전 삼성동 코엑스 앞에 전시된 웨이브(wave)는 8K 초고해상도의 기술력이 실제 파도를 도심에 가져다 놓은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앞으로 영상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1879년에 생산되었던 리바이스에서 만든  청바지 / 이미지 출처- 리바이스  >                                



복식사에서 '바지'가 탄생한 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의미가 있다. 직립 보행 시 필요한 인체의 다리를 완벽히 감싸서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활동성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현대 문명 사회의 기폭제가 된 '산업 혁명'의 최일선엔 언제나 작업복이 있었다. 그리고 질기고 강한 소재인 데님으로 만든 작업복인 청바지가 탄생하면서 현장의 편리성과 효율을 도왔다. 이 훌륭한 복식의 틀이 새로운 시대로 가는 문을 인간과 함께 연 것이다. 리바이스가 기존의 작업복의 틀에서 벗어나 좀 더 튼튼한 소재를 원하는 광부들의 니즈에 귀 기울인 호기심과 실행력이 낳은 창조적 결정체다.



백남준은 고전 예술에만 머물지 않고 변화를 거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속된 시도 속에서 '비디오 아트'가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내면의 상상과 외면의 기술을 결합하여 융합할 수 있었던 아티스트. 시공을 초월한 시간 여행자와 같이 미래를 유영했다. 그래서 지구 예술에 균형을 갖춘 새로운 틀을 선사해 신기원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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