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잭의 데님 웨스턴 셔츠
이끌림을 표현하는 원초적인 시선엔 사랑이 동반된다. 눈빛을 받는 상대방의 의사와는 별개로. 단순한 호기심의 행동을 넘어 마음이 닿기 전 먼저 도착해 인사한다. 몇 번의 시도가 이어질지 아니면 단번에 끝날 지는 서로에게 달렸다. 이 조심스러운 상호 관계를 마치고 나면 관계의 정의를 내리고 사회적 명칭으로 불리는 이름이 정해진다. 연인(戀人),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는 통상적인 단어가 금기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두 남자의 이야기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시작되었다.
1963년 미국 와이오밍주 시그널. 양 방목을 위해 밤낮으로 야영지를 지키는 일에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와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가 채용되고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떠난다. 낮에는 초원으로 양들을 몰아 풀을 먹이고 밤에는 방목지 근처 텐트에서 잠을 자며 양을 돌본다. 부족한 음식을 보충하기 위해 순록을 사냥해서 먹는 등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잭과 에니스는 조금씩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식사는 같이하지만 산림청이 지정한 구역과 실제 양을 방목하는 곳으로 나눠 따로 떨어진 곳에서 잠들었던 둘은 어느 날 늦게까지 술을 먹다 취해버린다. 양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에니스는 몸을 가눌 수 없어 바닥에 담요를 덥고 누워 동이 트길 기다린다. 모닥불이 꺼지고 추위에 떠는 에니스를 잭은 텐트 안으로 들어오라 하는데, 옆자리에 누운 에니스의 팔을 끌어당겨 가슴으로 가져가는 잭의 돌발행동. 놀란 에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적극적인 잭의 도발에 관계를 맺는다. 다음날 어색한 시간이 잠시 흐르지만 서로가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느끼며 더욱 가까워진다.
예상보다 일찍 철수하게 되면서 다시 보는 날은 기약하지 못한 채 에니스와 잭은 헤어지게 된다. 에니스는 알마(미셸 윌리암스)와 잭은 루린(앤 해서웨이)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살아간다. 4년 만에 엽서를 통한 회신으로 잭이 에니스의 집으로 가고,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 키스로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한 알마는 충격에 휩싸이고, 남편에 한 번의 일탈이길 바랐던 그녀의 바람은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만남을 갖는 행태에 절망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에니스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지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에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 알마는 에니스와 이혼한다.
20년 동안 이어진 잭과 에니스의 만남은 갑작스러운 잭의 죽음으로 끝맺음을 맺는다. 에니스는 그제야 회피했던 둘의 사랑을 마주 할 용기를 내기 시작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배경 속에 피어난 사랑을 담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대만 태생에 감독 이안의 작품이다. <음식남녀>, <와호장룡>,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의 세밀하고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그의 다수의 명작 안에서도 내게 가장 많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에니스를 연기한 배우 故히스 레저의 배역에 대한 강한 몰입은 소설원작 영화 캐릭터가 아닌 실존 인물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에니스의 무뚝뚝한 성격을 보여주는 목소리와 어투, 성장 배경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 수 있었던 시선과 몸의 행동 패턴을 대사와 함께 정교하게 녹여낸 열연이 잊히지 않는다.
영화는 '시선'으로 시작해 '시선'으로 끝난다. 두 남자가 처음 만난 날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에니스와 달리 잭은 면도를 하는 와중에도 사이드미러로 그를 향한 시선을 보낸다. 일이 확정되고 나서야 어색한 통성명이 오갔던 때도, 업무 투입 전 펍에 들러 짧은 대화를 나눌 때나, 처음 야영지에서 각자 텐트를 치고 멀리 떨어져 자는 날에도 잭은 언제나 먼저 에니스를 바라보았다. 잭의 일방적 시선으로 촉발된 시작이었지만 에니스 역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이 두려웠던 에니스는 잭을 원하는 깊은 끌림을 덮어 들어내지 않고 알마와 결혼했다. 둘 다 여성 배우자를 만나 혼인을 지속하지만 잭은 에니스에게 서로 이혼 후 함께 살 것을 바랐다. 그러나 남자 둘이 살면 동성애자로 주변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며 거부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자연은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으면서 자유로이 머물 수 있는 광활한 존재다. 잭과 에니스가 잠들었던 삼각형의 작은 텐트는 뾰족한 모양이 산과 닮아 있지만 천과 얇은 봉으로 지탱하여 조립한 쉽게 부서지는 위태로운 장소다. 그 불안정한 곳에서 일어난 사랑은 영속성을 기대할 수 없어 늘 두려웠다. 1960년대 미국 서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한다 말하면 멸시와 배척을 받아야 했던 시대성과 맞물려 두 사람은 결코 완성을 이루지 못할 거란 시각적 암시가 영화를 보는 내내 지배한다. 겉으로 밝힐 수 없었던 금단의 사랑은 잭의 죽음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는데, 그것은 어린 시절 잭이 쓰던 방에 걸려 있던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옷을 발견하고 나서다.
데님 웨스턴 셔츠는 잭이 20년 전 브로크백 마운틴에 갈 때부터 착용한 옷이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날 풀 죽어 있는 에니스를 보고 잭은 로프를 이용해 장난을 친다. 로프가 뒤엉켜 서로 넘어져 구르게 되고 에니스의 얼굴을 쳐 코피가 난다. 흐르는 피를 닦았던 에니스가 입은 체크 셔츠와 그의 상태를 살피던 잭의 데님 셔츠 소매엔 그때의 피가 묻은 상태로 당시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피로 더러워져 다른 걸로 갈아입느라 산에 두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옷이, 모습 그대로 잭의 셔츠 속에 겹쳐져 같이 발견 됐을 때 에니스는 자신을 향한 잭의 한결같은 마음과 사랑을 깨닫는다.
웨스턴 셔츠(Western shirt)는 카우보이 셔츠 (cowboy shirt)와 로데오 셔츠(rodeo shirt)라고도 불리며 1930년대 미국 대중문화를 통해 카우보이들의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소와 양을 키우는 목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위화감 없이 입을 수 있는 클래식한 아이템이다. 산처럼 솟은 요크(yoke)와 앞판에 웨스턴 스타일의 플랩(Flap)이 특징으로 몇 가지 고정된 디자인이 있으며 그 안에서 변화를 이뤄낸다. 목 밴드의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잠금장치는 스냅(snap)으로 간편하게 여 닫을 수 있어 워크웨어로서 큰 장점인 동시에 디자인의 포인트로 작용한다.
극 중에서 잭이 입은 진청의 데님은 모두 미국 브랜드 랭글러(Wrangler)의 제품을 착용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데오 대회에 출전하며 로프 던지기도 쓸 줄 아는 카우보이라는 것이다. 카우보이 라이프 스타일 데님 브랜드의 밧줄 꼬임이 섬세하게 표현된 레터링 로고와 데님은 착용자인 잭의 삶을 자연스레 대변했다.
에니스는 어릴 적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형과 누나에게 키워졌던 유년기의 영향으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삶의 제약 안에 살아오며 그것을 옷으로서 나타냈다. 작업복이라도 핏과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잭은 컬러가 다양한 옷과 큰 라펠 디자인이 돋보이는 코트를 입기도 하지만, 에니스는 넉넉지 못한 금전 상황에 멋 부리기보단 튼튼하게 오래 입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선택한 옷은 가격이 저렴하면서 내구성 높은 면과 데님 그리고 코듀로이 소재였다. 겉옷은 작업 시 작은 물건들을 넣고 다닐 수 있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편리한 디자인으로 그중에서도 실용성이 강한 브랜드 디키즈(Dickies)의 워크 재킷을 입어 잘 표현했다. 이에 호응하듯 하의는 어느 옷에나 튀지 않고 어울려 입을 수 있는 무난한 리바이스의 데님 팬츠다. 20년의 기간 동안 나아지지 않은 그의 재정 상태는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어 오랜 세월 반복적으로 착용한 탓에 자연스럽게 자외선에 원단이 탈색되어 빛바랜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소매 끝이 뜯기고 해어진 디테일까지 살려 '나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했던 에니스의 처량한 상황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그를 안타까워하고 보듬어 주고 싶었던 잭은 종종 로데오 경기 얘기와 로프를 던져 말 수 적은 에니스를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다. 잭은 처음 만난 날 입었던 데님 웨스턴 셔츠를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내려가는 날에도 입고 로프 던지기를 한다. 그날 에니스에게 던졌던 로프는 장난을 위장한 그의 진심이 담긴 표현인지 모른다. 로프를 올가미 삼아 여자와 결혼하려 떠나는 에니스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싶었던 게 아닐까......
허름한 트레일러를 보금자리로 삼은 에니스. 단출한 살림 속 작은 옷장 문을 여니 안쪽에 걸린 추억의 셔츠 두벌이 보인다. 체크셔츠가 데님 셔츠를 감싸 안고 포개어졌다. 처음부터 에니스를 바라보며 그의 삶을 포용하려 했던 잭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듯 이제는 반대로 자신이 그의 마음을 가슴에 안고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에니스는 나지막이 고백한다.
"Jack, I swear......"
브로크백 마운틴이 새겨진 엽서를 매만지며 읊조린 에니스의 말이 방 안을 채우자, 드러 낼 수 없던 사랑은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시간과 기억을 저장한 그날의 옷을 통해서. 형체가 없는 그 소리는 이제 함께 갈 수 없는 그리운 공간을 소환하며 영원히 기억하고 바라볼 것에 대한 간절한 서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