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흔들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할머니는 코끝으로 내려간 안경을 한 손으로 치켜올리며 느릿느릿 창문으로 다가가 덧문을 닫으며 말했다.
전쟁이 오나 보구나.
정말이었다. 정말로 전쟁이 난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이후 세상은 해체되었다.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들은 익숙한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만 했다. 나의 한쪽 눈은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 꽃무늬 벽지를 붙였다. 어깨도 얼굴도 인간보다는 사물에 가까운 색채를 띠었다. 모든 관념은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해갔고 종국에는 없던 것과 마찬가지와 같은 혼란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름을 버렸다.
이제 무얼 그려야 하지. 화가는 발가벗고 작업실에 앉아 생각했다.
생명을 얻은 그림자가 화가의 다리를 지나 소파의 등받이를 지나갔고 그게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을 상기시켰다. 전쟁은 인간과 사물의 거리를 자꾸만 좁혀갔다. 우리는 주전자와 테이블 그리고 담요 같은 것들과 얼굴을 나누어 가졌다. 어떤 사람은 부서진 신전의 기둥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거리는 온통 잿빛이었다. 전쟁이 거리에서 색을 빼앗아간 것이다. 따라서 화가는 지하에 숨어 색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화가만이 오로지 색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붉은색을 쓰려하지 않았다. 빨강은 거리의 비극에게 빼앗긴 지 오래였다.
우리는 커다란 캔버스의 한 켠에 토끼와 같이 작고 신성한 동물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려 넣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얼굴을 그릴 때처럼 토끼의 몸을 분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토끼는 귀여웠다. 화가는 가끔 거리로 나가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벽과 기둥에 토끼를 그렸다. 토끼 그림을 우연히 발견할 때면 아이들은 무척 기뻐했고 그게 우리에게 약간의 위로를 주었다. 어떤 날은 포탄이 떨어져 살아본 적도 없는 토끼가 죽어야만 했는데 그런 날의 밤에는 아이들이 거리로 나와 토끼의 눈과 귀를 주워 갔다. 아름다움은 작은 파편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마치 모래사장 속의 죽은 조개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아주 작게 몸을 깨트려 깊이 숨어있어야만 했다.
모든 악기가 부서졌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림으로 노래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화가가 색을 고를 때마다 참견했다. 그들은 아주 섬세한 화가보다 예민하게 물감을 골랐다. 화가들은 그가 참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느 순간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크게 뜨고 화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리세요?
바이올리니스트는 화가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화가는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했다. 음악을 보는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음악을 그리고 들을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정말로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집에 틀어 박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전쟁은 화가가 사는 거리를 피해 갔는데, 화가를 피해 가지는 않았다. 그게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애인이 말했다.
사라지고 싶어.
나는 그 말을 무시하는 척하며 속으로 오랜만에 애인의 초상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렇다고 애인을 앞에 세워 두지는 않았다. 애인이 잘 때, 애인이 샤워할 때, 애인이 밥을 먹을 때 나는 애인을 힐끗 쳐다보고, 몰래 훔쳐보고, 지긋이 바라보며 그렇게 애인의 파편을 모았다. 그리고 전쟁이 나기 전에 둘이서 찍은 사진들도 보고 애인이 나를 만나기 전에 찍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사진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애인은 초상화를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생겼어?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든 헝겊 인형처럼 생겼잖아.
그게 우리가 존재하는-혹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방식이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혹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눈에는 여전히 예뻐. 나는 애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랬더니 애인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말없이 내 무릎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도톰한 애인의 입술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 보며 어제 길에서 마주친 얼굴 없는 시체를 떠올렸다. 전쟁의 포탄은 암세포처럼 몸속 깊이 퍼져 감각의 메커니즘을 파괴했다. 화가는 감각하기 위해 그것의 체계를 재구성해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선 형태로 변했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한쪽 없는 사람들의 세상에 팔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이 끼어든 것만 같은 형국이었다. 우리는 다리 없는 다리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화가의 눈 역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터였다.
전쟁이 나기 전에 화가는 종종 숲으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석양이 지는 하늘을 관찰할 수 있었고 그것을 어렵지 않게 화폭에 옮겨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화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야 했다. 공포는 관찰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시간은 화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물은 존재하지 않았고 잔상으로 기억되었다.
나는 꽃병과 깨진 꽃병 그리고 말라가는 장미꽃 몇 송이를 차례차례 상상해보았다. 꽃병이 깨져서 서 있을 수 없는 장미꽃의 기분을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커다란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꽃병을 대체할 만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다 먹은 와인병 혹은 유리잔. 열림과 막힘이 있는 길이. 그 모든 것들이 꽃의 다리를 대체했다. 이런 식으로 화가는 세계의 해체를 극복해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꽃이 어느 곳에서나 머무를 수 있는 까닭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죽은 꽃만이 꽃병 속에서 만족했다. 거리에서 시체들은 군인들의 손에 들려 질질 끌려갔다. 군인들은 구덩이를 파고 석유를 부었다. 시체는 캠프파이어의 마른 장작이 되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들은 돌부리처럼 사람들의 발에 채이며 핀잔을 샀다. 시체는 장작이거나 오물이었다. 화가는 죽은 시쳇더미를 잊기 위해 숲 속에서 춤을 추는 나부의 사람들을 그렸다. 벗은 몸은 살아 있다는 신성함을 만끽했다. 문제는 애인이었다.
오랜만에 숲으로 산책하러 가고 싶어. 그림을 보더니 애인이 말했다.
안 되는 거 알잖아. 나는 애인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게 당연한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실은 버려두고 온 정원이 걱정돼서 그래. 애인은 말했다.
이 마당에 지금 정원이 문제야?
너도 알잖아. 새장이 있었단 말이야. 새들이 갇혀 있어. 걔네들을 놓아주고 싶어.
그래도 안 돼. 너무 위험해. 이 동네야 안전하다지만 숲은 너무 멀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애인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얼른 노트를 꺼내 새장 하나를 그려 문을 열고 세 마리의 새들을 놓아주었다.
애인은 나의 손에서 펜을 빼앗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강하는 작은 새에게 귀여운 눈을 그려 넣으며 말했다.
이게 나야. 이미 너무 오래 지났어. 정말로 놓아주어야만 해.
애인은 그날 이후 아침마다 작은 새의 그림 앞에 물을 떠다 놓고 기도했다. 화가는 그 모습을 그렸고 애인은 그림을 빼앗아 찢어 버리기를 두세 번 반복하던 어느 날 애인은 말했다.
혼자서라도 갈 거야.
그 새는 이미 죽었을 거야. 나는 말했다.
왜 그렇게 심술궂게 말하는 거야? 애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리도 이미 죽은 지 오래잖아. 새라고 별수 있겠어.
어차피 죽었는데 새 한 마리 못 구해줘? 애인은 마구 울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가자. 나는 버려진 정원에 가서 새를 놓아주겠다고 애인에게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그날 밤 우리는 소나타 그림을 앞에 두고 마지막 춤을 췄다. 먹을 것도 잔뜩 그리고 술에 취한 우리들의 자화상도 그렸다.
자화상이라며 왜 얼굴도 없어? 애인은 물었다.
잘 봐. 여기 있잖아. 이 마름모꼴이 나고 이 둥근 게 자기 얼굴이야. 자기는 귀엽게 생겼잖아. 나는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애인은 내심 좋은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제대로 그려줘.
그러나 다음에 사라질 듯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림 속에서라도 행복하고 싶단 말이야….
애인이 아주 서글프게 말하기에 내 마음도 몹시 서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와 애인은 그림 속에서 아주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눠 마시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부드러운 실크가 바람에 날려 우리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림 속에서 나는 담배도 한 대 피웠고 애인은 소설책을 몇 장 읽었다. 애인은 그림을 보며 아주 행복해했다.
애인이 잠이 들고 나는 몰래 숨겨 두었던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마셨다. 얼음은 없었다. 나는 잔에 따르지도 않은 채 벌컥벌컥 위스키를 마시며 아까 그렸던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림에게 마술사라는 지위를 허락했고 우리 스스로 최면에 걸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주는 얕은 환상이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행복의 다음 날이 되면 애인은 언제나 어제보다 더 슬픈 얼굴이 되어 그림을 찢어 버렸다. 세상이 이렇게 끝나버린 것이 나는 몹시 유감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숲으로 갔다. 가는 길에 애인은 죽은 군인의 바지를 뒤져 총을 한 자루 꺼냈다.
총이 필요하면 말하지 그랬어. 얼마든지 그려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애써 익살을 떨었는데 애인은 내 말을 무시하고 총탄을 확인했다.
버려진 정원은 여전히 버려진 채 있었고 새장은 기적처럼 거기에 있었다. 애인은 새장을 열어 새를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애인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하늘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우는 애인을 끌어안았다. 나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애인은 울면서 내 배에 총을 가져다 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오늘 죽기 위해 숲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인은 나를 쏘지 않았다.
나를 먼저 죽여줘. 그리고 자기가 따라와. 그럴 수 있지? 애인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응. 자기는 사람을 죽이기엔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그리고 나는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의 배에 총을 한 발 쏘고 그녀가 내 곁에서 떨어져 쓰러지기 전에 나의 배에 남은 한 발을 쏘았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잡고 숲에 나란히 누웠다. 하늘은 파랬다. 애인을 닮은 귀여운 새가 숲 속을 서성이며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렸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나는 간신히 말했다. 애인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죽어버린 게 후회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마지막 힘을 모아 애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날 세계는 끝이 났고 우리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