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 Mania]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양치기 소년이 심심해서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거짓말에 속아서 달려왔다. 양치기 소년은 재미있어하며 여러 번 반복을 한다. 어느 날에 정말 늑대가 나타났고,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아무도 도우러 가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이 돌보던 양들은 모두 늑대에게 잡혀 먹혔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의 전형으로 여러 형태의 판본과 패러디가 시대와 국가와 문명을 넘어 전승되어 왔다.
지금은 집집마다 방방마다 하나씩 설치해야 하는 화재경보기가 겨우 신축 건물에 설치되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화재경보기의 오작동이 빈번했다는 점이다. 신경이 거슬리게 요란하게 울려대는 경보기 소리에 어리둥절하곤 했지만, 곧 누군가 억지로 눌러서 끄거나, 심하면 더 이상 오작동되지 않도록 전원 연결을 끊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을 놀래게 하려고 화재경보기를 눌렀다는 어이없는 영웅담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으니 안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주 낮았다.
미국에서 원어민 교수가 초빙되었다. 대학에 한 명 밖에 없었던 원어민 교수 멜라니의 일정에 따라 토요일 오전에 수업을 하는 예외적인 일정이 짜였다. 물론, 주말이 휴무였던 대학의 강의동에는 우리 반 밖에 없었다. 그날도 날씨가 너무 좋았다. 수업한다고 강의실에 앉아 있기에는 너무 좋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원어민 교수는 칠판에 학습 내용을 판서하고 있었다. 생각 없이 공책에 옮기고 있던 내가 무심히 창가에 비치는 안타까운 햇살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혼자서 두 시간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 스트레스가 충만한 중년 아줌마 같은 목이 쉰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경보음의 상태로 보아, 시도 때도 없이 울다가 벌써 몇 사람에게 얻어맞은 것이 틀림없었다.
화재경보기 소리에도 교실 안에 있던 삼십여 명의 남녀 학생들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사람의 동요도 없이, 10년 이상 벽면 수도를 끝낸 고승처럼 흔들림 없이 담담히 노트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나 또한, 전쟁터에서 가슴에 총을 맞고 피를 철철 흘리는 와중에, 옆에서 걱정하고 있는 울먹이는 부하에게 "담배나 하나 줘'를 폼나게 외치던 노련한 병사처럼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를 시연하며 태연하게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처음 보는 인상적인 장면이 일어났다.
돌아서서 칠판에 판서를 하던 멜라니가 화재경보기 소리에 놀라서 돌아 서며 우리에게 물었다. "Fire?" 우리는 모두 깔깔 웃으면서 "No"를 합창했다. 멜라니는 잠시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거리다가 우리의 태연자약함에 안정을 되찾고 다시 판서를 시작했다. 내가 잊지 못하는 인상적인 장면은, 돌아서서 불이냐고 묻는 멜라니의 얼굴이 정말로 놀라서 빨갰다는 것이다. 갑자기 놀랄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 그대로 목 위로 드러난 부분이 모두 붉어졌다. 그때 화재경보기 소리에 '진짜로' 놀라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나는 무심히 듣고 전혀 반응할 생각이 없었던 화재경보기 소리가 불이 났을 때 사람들에게 대피하라는 경고음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잊을만하면 나를 잊지 말라며 경보기는 울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 그날도 경보기가 울었다. 멜라니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판서를 계속했다. 그래서 우리가 합창을 했다. "Fire!" 멜라니가 칠판 쪽에서 목만 조금 돌린 채 웃으면서 대답했다. "No."
한 때 영국에서 살던 아파트의 화재 감지기가 유달리 민감했다. 특히 부엌 쪽 천장에 매달려 있던 감지기가 유독 더 예민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세상 어디에 살든 한 번씩은 꼭 먹어야 하는 삼겹살만 구워도 빽빽거리는 통에 가스 불을 끄고 천장을 향해서 부채질을 하는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하루는 토스트를 굽는데 그날은 조금 바싹하게 먹고 싶어서 잠시 눌러서 조금 더 굽는다는 것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민한 감지기는 당연히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건물 전체에 화재경보기가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창문을 열고 부채질을 하고 불이 난 것만큼 혼비백산하여 정신이 없었다. 아파트 주민이 웅성거리며 나오기 시작했고, 아파트 주민 모두가 건물 밖으로 나가도록 요청되었다. 이른 아침 무렵이라 슬리퍼 차림에 수면 가운을 걸친 사람들도 많았고, 샤워 전이라 머리가 마음대로 헝클어진 사람들, 평소 같으면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을 세수도 안 한 채 다들 겨울 아침 찬바람에 건물 입구에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곧 알람의 오작동으로 보고 되었고, 사람들은 '하루를 잘 지내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영국의 대학에서도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일단은 모두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낮이고 밤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외 없이. 화재가 아니라 경보기의 오작동이라는 확인이 되고서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근무했던 영국 IT회사에서도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당연히 대피를 해야 했지만, 분기별로 한 번씩 화재 대피 훈련도 했다. 화재 시에 어느 부서는 어떤 통로를 이용하는지, 대피를 안내하는 역할은 누가 하는지, 어느 부서는 어느 대피 장소에 모이는지, 인원 파악은 누가 해서 어디에 알리는지를 연습했다. 내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불이 나면 어련히 알아서 할까'라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다. 억지로 밖에 나왔지만 자주 못 만나는 부서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모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바깥바람도 쐬는 예상치 않은 즐거움도 있었다. 이래저래 30분 정도 소요되는 일이라 전 직원들이 업무를 떠나 있는 30분은 IT회사로서는 큰 손해가 될 터인데 규칙적으로 되풀이했다.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전에 화재경보기 테스트를 했다. '지금부터 화재경보기 테스트를 한다'라고 알리고 잠시 건물 전체에 경보기가 울린다. 알면서 들어도 경보기 소리가 신경을 자극해서 몸이 알아서 놀라기 때문에 늘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주 금요일 오전이면 화재경보기 테스트를 했다.
더욱 놀라운 경험은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에 근무할 때는 안전관리 담당자가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화재경보기 작동 테스트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금부터 화재경보기 테스트합니다." 매일 아침 화재경보기 작동음을 들었다. 아주 드물지만, 슈퍼마켓에서도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모든 과정이 중단되며 무조건 옥외 주차장의 대피 구역으로 대피하여야 한다. 불이 난 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 연기의 흔적도 없지만 무조건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슈퍼마켓에서 전 직원과 고객들이 대피를 한다는 것은 IT회사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계산대에서 계산하던 것은 어쩔 것이며, 식음료 코너에서 오븐에 넣은 음식은 어떻게 할 것이며,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오작동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이 되어도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무조건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 오작동임이 확인이 될 때까지.
외국 생활을 오래 한 교민들이 꼭 옛날에 자기가 살던 오래된 과거의 한국을 기억하며, 거주 국가의 현재를 비교하며 비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나도 이러한 오류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니 현재의 안전 설비나 법령이 이미 세계에서 선도적인 수준에 있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한번씩 들려오는 대형 안전 사고와 관련된 한국 뉴스는 나에게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현재의 수준에 대한 나의 의심을 증폭시킨다. 시설이 개선되고 적절한 법령이 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전을 위한 절차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도 이를 준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운 토스트 때문에 추운 아침에 잠 옷차림으로 나온 우리 아파트 주민은, '이른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싶어 하였지만, 화재 경보가 울려서 건물 밖으로 나오는 절차에 대해서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슈퍼마켓에서 계산하던 물건을 그대로 둔 채 대피 장소로 가던 고객들도 '왜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나서'라고 불편해 하였지만, 화재 경보가 울려서 대피해야 하는 절차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내해 주어서 고마워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니.
오래된 어린이 동화를 진지하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글들도 있다. 행정 관리의 측면에서,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되풀이되었을 때 해고 등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적절한 조치가 내려져야 했다거나. 역사적 측면에서, 양치기의 업무가 많아서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로 무료하지 않았다거나. 또, 늑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의 경우에는 늑대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성인이 양치기로 있었지 어린아이에게 양치기를 맡기지 않았다든지.
거짓말을 했던 양치기 소년은 잘못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의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의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때도 뛰어갔어야 했다고.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달려갔어야 했다고. 그러면 양들이 살지 않았겠느냐고.
안전을 위한 절차는 100번 하기로 하였으면 100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번 발생할 수 있는 일에 99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냐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살기 위해서 아흔아홉 번의 쓸데없는 짓도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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