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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Sep 17. 2020

이른 아침 바닷가의 모녀

우리 삶은 왜 그리도 똑같은지

바닷가 아침 산책


이른 아침 해 뜰 무렵이면 마리나와 바다를 잇는 긴 산책로를 따라서 걷기로 했다. 시간과 마음 조절을 못해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어서 잠이든 하루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아침의 상쾌함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 반려견의 생리욕구 해소를 위해 짧은 반경을 돌고는 사라지는 할머니 한 분과 두 마리의 개를 이끌고 빠르게 달려가는 아저씨 한 분과 바닷가 옆에 앉아서 표정 없는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노인 한 분이 나의 아침 산책에 등장하는 배경이다.



새빨개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서 지나가는 자기 관리에 부지런한 여행객들이 간혹 예상하지 못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아직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달리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여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나의 운동법이다. 그래서 운동이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깝다. 그게 무슨 운동이 되느냐는 핀잔에, 70대 후반까지는 계속할 수 있는 소위 '지속 가능한(sustainable)' 운동법이라 설레발을 친다.


오늘 아침


마리나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평소와 다른 배경 인물들이 있었다. 짙은 회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10대 소녀와 애써 꾸민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중년 여성이 조그만 백팩을 가운데 두고 바닷가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은 외모와 차림새로 보아 순박한 포르투갈 시골 아낙 같았고, 이른 아침 그 시간에 바닷가에서 만나기 힘든 부류였다. 10대 소녀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듯 후드티의 앞자락을 당겨서 눈을 거의 덮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둘 다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반환점을 돌고 오는 길에 궁금해서 선글라스 낀 곁눈질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녀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 소강상태였고, 그저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 것 같아서 불편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대책 없이 순박한 얼굴들이었다.


어떤 문제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저녁에 모녀의 집에서 소란스러운 다툼이 있었으리라. 소녀가 억울했든지, 소녀의 생각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든지, 항상 말없이 순종적이었던 소녀는 처음으로 반항을 했다. 그래서 더 소란스러워졌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 수준의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그 반대편에 서 있었으리라. 그 중간에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평생을 희생해온 말없는 엄마가 있다.


내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나 보다. 픽션이기도 하지만 우리 어릴 때는 흔한 스토리이기도 했다. 가출과 무작정 상경과 입지전적 성공담의 탄탄한 배경이 되는.


가출 그리고


밤새 눈물을 훔친 소녀는 아침에 늘 들고 다니는 작은 백팩에 휴대폰과 어디론가 떠날 수 있을 정도의 돈도 들어있지 않는 지갑을 챙겨 넣고 무작정 집을 나섰으리라.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라, '이 집에 있기 싫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술에 취한 아버지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엄마는 새벽에 부스럭 그리는 딸의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잡을 염치도 없고, '어디 갈 곳도 없을 것인데 어쩌려고 저러나' 그저 걱정이 되어서 저만치 거리를 두고 따라나섰으리라.


집을 나선 소녀는 무작정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순간 당황했으리라. 집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세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가파른 절벽이 있다. 막상 그쪽으로 가려니 어둠 속에서 가는 길을 찾기도 힘들고 높디높은 절벽과 파도 소리가 무서웠을 것이다. 어쩔까 어떻게 해야 하나 주저하며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리나까지 와버렸을 것이다. 밤에도 어둠이 없는 듯이 온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는 마리나의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가장 어두운 끝자락에 앉았으리라.


곧 그 앞에 엄마가 소리 없이 앉았고, 소녀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었으리라. 특별한 대상을 향한 신경질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어쩔 수 없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로. 엄마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이 없었고, 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해는 언제나처럼 너무나 아름답게 바다 위로 올라왔다. 그때 선글라스를 쓴 동양인 하나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아 보려고 두 팔을 '촤촤' 추켜올리며 짧은 다리를 종종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를 어떻게 볼까 싶어서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활개를 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이한 마스크를 덮어쓰고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한 채 몸을 돌려 지나가는 천지가 개벽한 2020년도에, 40년이나 50년 전 고향 마을 어귀에 앉아서 하필이면 그때 지나가는 우리를 난감해하던 똑같은 상황 속 동네 누나의 모습을 보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해도 참 안 변했다. 어찌 인간들이 사는 모습은 이리도 같은지. 언어도 한 단어도 같은 것이 없고, 얼굴도 전혀 다르고, 피부 색깔마저도 다르고, 날씨도 다르고, 먹고사는 것이 너무도 다른 세상의 끝에서 답답한 현실에 힘들어하던 어린 누이와 측은한 자식들로 속앓이를 했던 불쌍한 우리 엄마를 오늘 아침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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