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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Mar 03. 2022

들고양이와 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슬기로운 산촌 생활 에피소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로 손꼽히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 중의 일부다.


'존재는 인식이다'라는 인식론에 과몰입하여, 나의 인식을 확장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포부를 가진 때가 있었다. 온갖 세상 지식과 정보 나부랭이를 채굴하며 들떠 있었던 무모한 청년 시절에 수첩의 첫 장에 적혀 있었던 시구절이다. 나에게 꽃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았다. 시인은 내가 이렇게 해석하고 집착하리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꽃의 패러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해석의 폭이 옹졸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오규원 시인이 다시 써준 시 '꽃의 패러디' 중의 일부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갔고, 동시에, 주위에 존재하지만 이름이 없는 것들에 대해 이름도 붙여 갔다. 나는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랑새


한 때, 가택 침입에 대한 응징으로 참수당하기 직전에 '애완 파리'로 명명되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던 파리의 이름은 '랑새'였다. 파리의 공통 성씨까지 합하여 부르면 '파랑새'가 되겠다. 한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묵인하며 평화롭게 같이 살다가, 반려 파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지하기 전에 방문객의 손에 허망하게 죽었다. (랑새 이야기, https://brunch.co.kr/@algarve/87)


고양이 똥


어느 날부터 고양이가 우리 집 울타리 쪽 레몬 나무 아래를 개인 화장실로 지정하여 정기적으로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분명 개인 사유지이기도 하고, 화장실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합의를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 집 고양이인지 정체를 파악하고 후속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밤 중에 와서 볼일을 보고 사라지는 통에 정체 파악이 힘들었고, 한 동안 나와 신경전을 벌였다.


매일 아침에 흙으로 덮어 놓은 배설물을 발굴해서 버리고, 인터넷으로 고양이 퇴치법을 검색하고, 고양이가 싫어한다고 해서 레몬즙을 짜서 뿌리고, 자른 레몬을 깔아 놓고, 원두커피 찌꺼기를 뿌렸다. 효과가 없었고, 나는 약이 바짝 올랐다. 


어느 날 석양 무렵에 회색에 검은색 무늬를 띤 고양이가 다른 때와는 달리 일찍 화장실이 필요했는지 레몬 나무 아래로 가는 것을 우연히 2층 침실 창문을 통해서 보았다. 직감적으로 저 놈이다 싶어서 2층에서 창문을 두드려 보아도 효과가 없었다.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빨리 계단을 타고 내려와서 거실을 질주하여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다. 고양이에게 나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서 다시는 못 오게 하려는 과장된 몸짓과 내가 생각하기에 고양이가 가장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것 같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예상대로, 깜짝 놀란 고양이는 옆집 담을 넘어 사라졌다. 10만 대군을 물리친 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서서 고양이가 사라진 석양이 걸린 담장 너머를 숨이 차서 씩씩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고양이 똥을 치우지 않아도 되겠군.'


더욱 찬란한 아침


찬란한 아침이 밝았다. 전쟁에 이긴 후의 아침은 더 평화롭고, 똑같은 햇살도 더 아름답고 포근했다. 자고 나면 회복되기보다는 더 굳어지고 뻐근한 노쇠한 육신을 이른 아침 약수터 아저씨처럼 휘휘 저으며 레몬 나무 아래를 쳐다보았다. 경악했다. 똥을 싸고 땅을 긁어 덮어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흙무더기를 파면 그놈의 냄새나는 똥이 암매장된 사체처럼 발견되리라는 생각에 이르니 '이 자식을 어쩌지'라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캣맘


한국에서는 '캣맘'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주인 없이, 또는 적절한 보살핌 없이 도시에서 생존하고 있는 고양이를 '길고양이'라고 부른다. 도심지나 그 인근에서 서식하는 야생고양이를 지칭하지만, 야생에서 태어나서 야생 상태에 있기보다는, 대체로, 인간에 의해 유기되어 인간의 보살핌 밖에 방치된 상태다.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애처로움을 느끼는 캣맘의 심정을 이해하고, 적절한 훈육과 통제 밖에 있는 길고양이들로부터 파생되는 사회 문제 또한 이해가 된다.


길 고양이 vs 야생 고양이

 

반려묘 문화가 상당히 오래된 서양에서는 현재 야생 상태에 있는 고양이도 구분하여 부른다. 영어권 표현으로 살펴보면, 원래 집고양이인데 유기되거나 집을 나가서 분실이 된 야생 고양이는 '길을 잃다'는 뜻의 stray를 붙여서 Stray cat이라 부르고, 처음부터 야생에서 태어난 야생 고양이는 '야생'과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뜻의 feral을 붙여서 Feral cat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에서 태어나서 길들여지지 않은 채 야생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를 '야생 고양이'라 생각하고, 유기되거나 분실된 고양이는 현재는 야생 상태에 있다고 해도 '야생 고양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길고양이'로 구별하여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야생 고양이에는 길고양이(Stray cat)와 들고양이(Feral cat)로 나눌 수 있다'고 정리하고 싶다.


무심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한 두 달 정도 나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기간 중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니 문제의 고양이가 우리 집 아래쪽 언덕 풀숲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일단 주인의 보살핌을 받는 집고양이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초기에는 항상 거리를 두고 있고, 우리가 관심을 끌려고 소리를 내고 손을 흔들어도 가만히 쳐다보거나 곧 고개를 돌릴 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보살피는 사람도 없이 산골짜기에서 혼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화장실을 옮겨라고 설득을 하는 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고, 외진 레몬 나무 아래라 절대로 화장실로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은 청결함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매일 똥을 발굴하여 버리는 고고학 수련 과정을 포기하였다. 


계속 행동을 지켜보니, 레몬 나무뿌리 쪽에 근접하여 볼일을 보고, 본능적이겠지만, 주변의 흙을 긁어다가 덮어서 배변의 흔적을 감추는 작업을 매우 성실하게 하였다. 덕분에 레몬 나무 아래가 부지런한 정원사가 다듬어 둥글게 북돋운 것 같은 형태가 되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그렇게 했다면 칭찬하고 자랑을 했을 것이다. 우리 고양이는 매번 정해진 레몬 나무 아래에서 볼 일을 보고, 흙을 덮어 둥글고 예쁘게 정리한다고.


우리 가족은, 우리 집에 같이 살지는 않지만 '반쯤은 거주한다'라고 볼 수 있는 문제의 들고양이에게, 상당 기간 동안, 일반 명사인 '고양이'로 부르다가, '반응도 없고, 대답도 없이 무심하다'고 해서 '무심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날부터, 우리에게 무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무심이는 레몬 나무 아래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볼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름을 부여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가 된 것이다.


무심이의 정체성


나는 무심이를 '비전향' 길고양이 상태로 진단한다. 사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기간이 상당히 오래되었고, 길고양이와 들고양이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길고양이의 특성인, 혼자서 살고 있고, 꼬리를 세우고 집고양이처럼 걷고, 나의 눈을 쳐다 보기도 하고, 털 관리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서 푸석푸석하다. 동시에, 들고양이의 특성인,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고, 야옹거리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는 법이 없으며, 밤에 활동을 하는지 낮 시간 내내 잠을 잔다.


낮에는 적당히 떨어진 언덕 아래 공간에서 귀를 종긋 세운채 내내 졸고 있다.


집에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는데 왜 사느냐는 아내의 눈총을 애써 회피하며 슈퍼에서 고양이 먹이를 구입해서 지난 두 달간 제공해 왔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몸짓으로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먹고 가더니, 요즘은 마당을 천천히 가로질러 와서 유유히 먹고 간다. 태도가 조금은 편해진 듯하다. 처음에는 사람이 보이면 도망을 갔지만, 이제는 도망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2미터 이상의 거리를 유지한다. 무심이는 시간이 지나면 안정되는 길고양이와 시간이 지나도 계속 경계하는 들고양이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무심이는 거리를 둔 채 담장 위에 무심히 앉아 있다


무심이 혼나다


대개 길고양이는 경계시에도 하악질이나 으르렁 거리지 않지만, 들고양이는 경계의 표시로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한 번은 무심이가 낮은 담장 아래에서 졸고 있다가 그 위로 불쑥 나타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저만치 물러나며 몸을 낮추고 하악질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무심이에게 뭐시라 뭐시라 삿대질을 했다.


"야 인마, 내가 너 먹으라고 슈퍼 가서 먹이도 사서 먹이고, 여태껏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야옹하며 애교를 떨어도 모자랄 판에 뭐 성을 내며 하악질을 해. 하~ 은혜도 모르는 놈일세.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알았어?" 


유창한 한국말로 포르투갈 고양이에게 질펀하게 퍼부었다. 무심이는 이 아저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나 싶은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튼, 나의 한국어 잔소리가 포르투갈 고양이에게 먹혀들었는지 더 이상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


전향과 비전향 사이에서


무심이가 사상과 이념을 바꾸는 파격적인 전향을 택해서,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꿀지 모르겠다. 현재의 불편한 자유를 유지할지, 아름다운 구속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무심이가 점점 더 야위어 가고, 보이는 내내 졸고, 털이 더 푸석푸석해지고 있다. 나이가 들었거나 병약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다. 


나는 무심이가 원하는 순간까지, 무심한 척 밥그릇을 무심이 가까이에 가져다 놓고, 소심하게 안 보는 척 곁눈질로 지켜볼 생각이다. 사람과 고양이로 만났지만, 입양이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절차는 거치지 않았지만, 서로를 알아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무심이가 고단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혹은, 더 좋은 장소를 발견하여 나의 보살핌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때까지, 의지할 수 있는 편안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비록 완전한 관계는 아니지만.


최근에는 야윈 무심이가 가든 테이블 위에서 경계심 없이 졸고 있는 파격적인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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