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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Sep 06. 2020

떨어진 바나나를 위한 위로

떨어진 게 더 좋을지도 몰라

바나나의 일생


나는 바나나의 일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바나나가 왜 이 세상에 왔으며 어떤 목적으로 살다가 가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기나긴 여정을 거쳐서 이 먼 땅끝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인연이라고는 신기한 질감과 미묘한 달콤함을 가진 독특한 구조의 바나나를 먹을 때 '참 신기한 과일'이라고 잠시 생각을 하는 정도다.


오늘 바나나 판매대를 지나다가 아래에 떨어진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깨끗하고 잘 정돈된 매대에서 떨어져서 아래로 굴러 떨어진 불결한 녀석들이. 무성의하게 쌓은 직원의 손길 때문인지, 좋은 놈으로 골라가려는 손님의 욕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매대에 올려진 상품만 골라서 오곤 했다.


오늘은, 어쩌면, 떨어진 바나나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영양분 공급에 헌신한다'는 바나나 종족의 이념 체계가 존재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런 명분을 인간으로부터 강요받고 세뇌되어 일찍 팔려서 껍질이 벗겨진 채 날카로운 칼에 잘리거나, 인간의 무딘 이빨에 짓이겨져 천 길 위장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명예로운 삶이라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또, 이 세상에 더 오래 살아 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혹시, 만약, 더 오랜 시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바나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떨어진 바나나가 훨씬 잘 된 일이다. 혹시,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에 인간이 알아챌 수 없는 미묘한 움직임으로 중력의 법칙을 이해하고 매대로부터 떨어져서 탈출을 시도했는지 모른다.


축하한다.


우리네 삶처럼 그 틀(매트릭스)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강요된 질서로부터 뛰어내린 그 용기에 대해서. 너의 시도에 대해서. 오늘은 떨어진 바나나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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